연하랑 사귀는 게 어때서

글로 배운 연애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다.

by 삶은 별

누가 그랬다. 글로 연애 배운 사람은 연애의 답을 꼭 찾으려고 한다고 근데 연애고 인생이고 정답은 없다고... 글로 연애를 배우고 싶었다기보다는 먼저 연애한 사람들의 성공을 잠시 훔쳐보고 나도 그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10년 가까운 장기 연애를 했었음에도 돌이켜보면 그때 한 연애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배려와 이해라는 굴레 안에서 나 혼자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애썼던 시간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랑은 탁구 경기처럼 자연스러운 랠리가 이어져야 그 경기를 하는 맛도 나는 것인데 나는 늘 지는 경기가 두려워서 정확하고 경쾌한 랠리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4년의 연애를 2번에 걸쳐 무려 8년 동안 해온 여자이지만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너무나도 느린 연애 철학을 갖고 있었다.


소개팅을 해도 2-3번은 만나보고 에프터를 받을 것!

손은 그래도 사귄 후에 잡아야 하는 것!

뽀뽀랑 키스는 그래도 사귀고 나서 소개팅 후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지나야 하는 것


누가 들어도 비웃겠지...'하하하하하'

요즘 시대에 무슨 저런 연예 순서가 어딨냐 싶지만 곱씹어 봐도 나는 저렇게 연애를 해왔던 것 같다. 3번째 남자까지는 말이다. 단계고 순서고 연애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을 서로의 마음이 젤 중요한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34살이 되어서야 믿게 되었다는 말이다.


연애에 역시 이론 따위는 결코 필요 없었다. 잘 사귀어 결혼까지 한 나의 남편을 떠올리자니 나의 이상형 리스트에는 전혀 없었던 연하남이었으며 키도 웬만큼도 크지 않았으며 첫 만남 후 두 번째 만남만에 이미 손을 잡고 있었고 3번째 만남에서 나는 이미 사귀자는 말을 듣고 있었으며 4번째 만남에서 차를 가져와서는 입술을 확~ 덮치는 것이 아닌가

'오 마이 갓 '

4번째 만남까지 우리는 불과 2주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연하남은 어리고 어리광 부린다고 누가 그랬단 말인가? 나름 누나인 나였는데 어느샌가 나는 그가 하잔데로 따라가고 있었다. 연애엔 이론 따윈 잘 나가는 기술 따윈 필요 없다. 전혀...


나는 사랑으로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들을 이해한다 -톨스토이- @사진출처 Unsplash

사실 두 번째 만남부터 우리의 만남은 예사롭지 않았다. 이론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흘렀기에 적잖이 당황하여서 그랬는가 몰라도 데이트가 끝날 무렵 그의 손을 잡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 보면 정말 웃음밖에 안 나온다.

나를 당황케 만들었던 두 번째 만남의 장소가 '놀이동산'이었다. 놀이동산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놀이동산 너무 좋아라 하지만 소개팅 두 번째 만남에서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과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 5월 근로자의 날이 두 번째 만남을 가질 수 있는 날이었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차 가지고 갈게요 우리 쉬는 날이니 드라이브해요"

나는 당연히 좋았다. 오랜만에 시외로 가서 여유롭게 즐길 생각에 은근히 설레었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놀이동산 어떠세요? 서울 랜*, 에버랜*,롯데 월* 어디가 좋으세요?.

헐... 놀이동산이라니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소개팅 두 번째 만남에서 놀이동산이라니 솔직히 너무 당황스럽긴 했다. 놀이동산 사실 너무 좋아하는데 소개팅남과 가기엔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근데 그렇다고 '싫어요'라고 하기엔 나름 계획을 짠 상대방에게 무례한 행동임을 알기에 결국 나는 거절을 못했다.

" 네 괜찮아요. 그럼 에버랜* 가요 우리 "

괜찮긴 개뿔! 나는 하나도 안 괜찮았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우리는 용인으로 갔다. 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이 어이없는 놀이동산으로 우리의 관계는 더욱더 돈독해졌으며 말도 안 되게 더 친해졌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말이다.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빅터 위고- @사진출처 Unsplash



나는 예전 소개팅을 할 때도 남자들이 보통 밥을 사고 나면 나는 차를 샀다. 사실 나는 그랬다. 아무나 사고 싶은 사람이 사면된다고 생각했다. 놀이공원에서도 어차피 그 사람이 차를 가져왔고 분명 밥도 살 테니 놀이동산 자유이용권은 내가 사자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당당히 매표소로 가서 계산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그때 계산하는 나를 보고 조금 놀라기도 했고 신기했단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여자가 먼저 계산하는걸 못 봤단다 세상에나 이 남자 도대체 그동안 어떤 여자를 만나고 다닌 건지...


근데 문제는 설마 할인 혜택 못 받겠어하고 내민 나의 지갑들의 카드들이 전월 실적 문제 등으로 세상에 그 흔하디 흔한 놀이동산 자유이용권 할인이 안된다는 것이다. 자그마치 7만 원이 넘는 돈인데 할인을 받을 수 없다니 충격적이었다.

'그냥 결제해 주세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소개팅 상황이었기에 구질구질 한 모습은 또 보이기 싫었던지

나도 모르게 쿨한 척 그냥 카드를 긁었다.



본의 아니게 7만 원이라는 거금을 결제하게 되자 이왕 온 거 돈 아깝지 않게 열심히나 타보자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솔직히 이렇게 열심히 탈 생각은 일도 없었는데 미쳐 결제하지 못한 카드 덕분으로 그는 내가 너무 잘 타고 잘 노는 모습이 너무 좋았단다. 그 덕에 줄을 서있는 동안 기다리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고 조금 무서운 놀이기구에서는 나도 모르게 그가 잡아준 손을 놓지 않고 있더라.. 둘만의 시간을 너무 빨리 가진 것 아닌가 싶을 만큼 두 번째 만남에서 그 놀이동산 안에서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커피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였고 음악을 들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주말엔 집 앞 별다방에서 가끔 책을 보며 여유를 즐기는 것도 비슷하고 맥주 한잔 마시며 집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것마저 닮아더라.. 우리는



나는 그 길다는 4년 동안 연애를 2번이나 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았었다. 4년쯤 사귀다 보면 익숙해지는 게 많아져 자연히 편안해지기도 한다지만 그땐 나는 시간이 지나면 그때의 남자 친구들이 내가 원하는 것들 해주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착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4년 동안 말이다


나는 커피를 좋아했고 걷는 것을 좋아했고 분위기 좋은 바를 참 좋아했음에도 그들은 소주를 좋아했고 차 타고 다니는 것만 좋아했고 축구경기가 틀어져 있는 호프집을 더 좋아했었다. 나는 늘 그들의 방식에 맞춰주었고, 그들도 언젠간 나를 위해 배려해줄 거야 라는 막연한 착각 속에 그 착각이 힘을 잃어갈 때 가끔씩 그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곤 나는 그 한 번에 퍽이나 고마워 감동을 하고 그걸로 나는 그사이 감정은 싹 잊은 채 바보같이 4년을 만나왔던 것 같다.


그래서 였는지 몰라도 4번째 나의 사랑이 되어준 지금의 남편이자 그 놀이동산 소개팅 남.

그 흔한 커피를 좋아한다며 자꾸 웃어주질 않나..

이어폰 꽂고 같이 음악 들으며 걷자고 해주질 않나..

나른해질 주말 오후엔 책 하나 씩 들고 집 근처 커피숍 가서 여유를 만끽해보자고 하질 않나..

퇴근길엔 가끔 공원 벤치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캔 마시며 웃게 해 주질 않나..

그냥 소개팅 녀가 좋아한다니 맞장구 쳐주는 것이 아닌 나도 너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같이 가보지 않을래?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퍽이나 설레었었다.

연예의 기술이란 없다.
같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견하고 알게 된다.
서로의 진심을




어쩌면 오늘의 놀이동산도 그가 철저하게 계획하고 접근한 고난도 연예 기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이 통했기에 그 기술도 통했을 거라는 생각해본다.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은 결국 일시적인 모습이고 끝이 안 좋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진심으로 같이 좋아해 주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닮아가고

서로를 배려하다 보니 자연스레 싸움이란 것을 하지 않게 되고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이제 소개팅남에서 남자 친구를 지나 내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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