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모녀의 바쁜 하루
오전 10시, 집을 나서다
"3월 31일부터 콜핑 세일한다는데?"
엄마가 어제부터 하셨던 말. 근처 콜핑 매장의 영업시간이 오전 10시부터다. "엄마, 10시에 출발하자."
충분히 자식 뒷바라지 일을 다해와서 쉬는 엄마백수와, 잔병치레로 잠시 쉬어가는 딸백수 둘은 오늘은 다른 날보다 꽤 일찍, 집을 나선다. 딸백수에겐 어찌저찌 쟁취한 아버지 명의의 모닝이 있다. 모닝의 트렁크에는, 백수 모녀가 언제든 목욕탕에 갈 수 있게 온갖 세면도구가 담긴 목욕바구니와, 언제든 장을 볼 수 있게 뒷좌석에는 마트 장바구니 두어 개가 실려있다.
먼저 오늘의 목적지였던 콜핑 매장, 어렵사리 좁은 공간에 주차를 마치고 들어가니 진작에 내려서 매장에 들어온 엄마가 열심히 쇼핑을 하고 계신다. 옆에 오는 직원도 없어서 오히려 편하게, 모녀는 저마다의 관심 있는 옷가지를 탐구한다. 이것저것 사고 보니 엄마 몫 1/3, 내 몫 1/3, 엄마가 챙긴 아빠 몫 1/3까지 해서 20만 원 정도가 나왔다..
백수인 나의 신용카드로 할부 결제. 흠, 조만간 일하러 가야겠군.. 이월상품이라 할인폭이 컸기에 좀처럼 쇼핑을 안 하던 모녀의 눈이 돌아갔나 보다..
'엄마 절에나 가자.' '그럴까.' 차를 휙 돌려서 우리가 종종 모닝을 타고 가곤 했던 절로 향한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절 안의 식당에서 맛깔난 잔칫국수와 밑반찬으로 나온 겨울초 나물을 먹는다.
엄마: '이게 겨울초야.'
나: '더 퍼올까?'
엄: '아니'
엄: (조금 먹다가)'이거(겨울초) 좀 더퍼온나.'
나: '아~~~~ 이미 시간오바다~~~(결국 더 퍼옴)'
티격태격 모녀는 차에서도 식당에서도 말로 탁구를 한다.
절에는 우리만의 카페, 맛있는 자판기 커피와 좋은 풍경 속 벤치가 있다. 천 원에 두 잔. 오백 원짜리 고급 밀크커피가 꽤 맛난다. 날이 흐려서 평소라면 따신 햇살이 비치는 자리도 조금 서늘하다.
'자, 이제 걷자.' 엄마가 먼저 벤치에서 일어난다. 엄마를 잘 따라가는 듯하다가 나는 매번 들르는 절 안의 쇼핑몰(내가 이름 붙인..)로 향한다. 마침 곧 친한 동기 언니의 생일이다.
이번 달 나의 생일에 받은 선물만큼은 해주려고 쇼핑몰을 기웃거린다. 한참여 뒤에, '행방불명되었지만 어디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나를 찾아 엄마도 쇼핑몰에 들어왔다.
'저기요, 운동하셔야죠.' 누군가 훅치고 옆으로 들어온다. 엄마다. '아~~ 00언니 생일선물 산다고~' 괜히 능청을 떨다 계산하고 엄마랑 같이 한 바퀴 더 돌아서 절 밖으로 나간다.
엄마는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걸어가고, 나는 주차장에 대놓은 차를 끌고 나가서 입구 주차장에서 만날 계획을 세운다. 몇 분 만에 입구 주차장에 도착해서 언니에게 같이 보낼 뻥튀기 두 봉지를 사서 돌아오니 그새 도착한 엄마가 보인다. 날이 상그라워서 집으로 바로 갈까 하다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것을 알아챈다. 돌아오는 길 종종 다니던 목욕탕을 지나기 전 엄마에게, '엄마, 뜨끈하게 목욕이나 하고 갈래?'하고 반농담으로 말했더니 대번에 오케이 하신다. 유턴을 해서 목욕탕에 주차 완료. 목욕바구니는 언제나 트렁크에 있으니 별다른 준비가 꼭 없어도 된다.
목욕탕에서 내리며 엄마가 하는 말, '돈만 있으면 이렇게 참 좋다.' 허허.. 고작 백수 신분에 오늘 둘이 쓴 돈을 굳이 세어보지 않는다. 아주 갑부라면.. 그 돈을 쓰기만 하면서 살기도 바쁘리라.. 목욕탕엔 다양한 키와 몸매를 가진 사람들이 즐비하다. 온탕에 들어가서 공기 중이라면 불가능할 속도의 운동을 물의 부력의 도움을 받아 해본다. 탕에 사람이 없지만 물이 튀는 것은 조심스럽다. 물안에서만 내 기준 초스피드로 다리를 휘젓는다.
문득 수영을 잠시 배웠던 때가 생각난다. '우리가 남이가!'하고 어색하게 양손에 서로서로의 손을 잡고 끝날 때 다 같이 구령을 외쳤었지..
냉탕은 어느 때부터 들어가기 겁나는 곳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에는 냉탕 갔다 온탕 가면 몸에 전기가 통하듯 찌릿거리는 기분도 종종 즐기곤 했었지만.. 덩치는 커졌어도 자발적으로 차가운 물에 뛰어드는데 없던 겁이 생겼다.
탕에 너무 오래 있으면 어지럽기도 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안경을 안 쓰니 근시라서 엄마가 자세하게는 안보이다 보니, 엄마가 있었던 탕에 앉아있는 아줌마 한명을 엄마로 착각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우리 모녀는 목욕탕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젖은 머리를 망사모자나 샤워타월 같은 것으로 잡고 있기도 해서, 그런 특색 있는 모양새로 조금 멀리 있는 서로를 인지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필 오늘은 엄마가 목욕탕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다 보니 여러 아줌마들과 스타일이 겹친다. 엄마의 체형과 특징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엄마를 인식하기도 한다. 목욕탕에서는 종종 텃세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는 하나가 아닌 둘이다 보니, 그런 만약의 핍박(?)에도 호기롭다.
그렇게 모녀는 약 두세 시간의 목욕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직장인 남동생의 저녁 찬거리를 마트에 들러 사가자 하고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곧 동생이 퇴근해서 돌아올 시간, 그전에 나는 재활용품 분리수거를 하고 엄마는 동생의 저녁밥을 지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