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눅 든 돼지
장장 80킬로에 가까운 돼지인 내가 건드리고 가는 곳이면, 어디든 흔적이 남는다. 일례로, 거실의 소파 위에 조금만 치대다가 내려와도 엄마의 눈에는 영 볼썽사납게 이불 등이 흘러내리고 구겨지고, 그냥 툭치고 지나갔을 뿐인데 걸려있는 옷가지가 한두 가지 떨어진다. 자신이 움직이는 반경이 그리 크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돼지는 한편으론 조금 억울하다.
여튼, 이런 돼지가 자신이 '돼지'임을 다시금 인식시켜준 사건이 불과 하루를 사이에 두고 두 가지가 터졌다. 먼저, 동생이 꽤 비싼 값을 치르고 엄마에게 사드린 등산스틱의 고장. 사실 주로 가는 집 뒷산은 야트막한 편이라 등산스틱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음에도, 거대 덩치에 '호신용'으로 하나만 들고 다니는데(엄마도 하나만 들고 다니신다) 그중 하나가 어제 맛이 가버렸다. 그나마 2단 스틱인데.. 아래 부분의 조절 나사가 멈추지 않게 되어버린 것. 아마 특정 방향으로 압력을 계속 받으면서, 스틱 자체가 휘어져버려서 더 이상 조절 나사에 의해 고정이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뭐, 그래서 오늘 콜핑할인매장에서 59,000원의 거금을 주고 등산스틱 하나를 추가로 구입했다.(두 개가 아닌 하나 가격이 거진 5만 원이니.. 일부러 저렴한 것보다 좀 가격이 나가는 것을 샀지만..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이렇게 스틱을 재구입해온 오늘,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가끔 앉는 식탁의 자리에 부엌일을 좀 보다가 앉았는데, '딱'소리가 난 것. '뭐가 떨어졌나' 싶어서 무심히 있었는데.. 일어났다가 다시 앉는 순간 의자 다리가 휘어진 것을 발견했다. 거실의 아버지가 하필 '목격'해버렸다.. 나중에 살펴보니 장장 10년 정도 된 그 식탁의자는 (등산스틱과 마찬가지로) 거의 '맛이 가서' 새로운 나사 등이 없는 한 수리가 불가능해 보였다.
사실 나보다 동생이 더 많이 앉았는데... 하필 내가 앉았을 때 맛이 갈게 뭐람.. 괜히 억울했지만 별 수 있나..
동생의 퇴근 때 가족끼리 이야기할 거리가 또 하나 생겼다.(듣기 싫어서 방에 숨어도 다 들리니.. 뭐, 어쩔 수 없지..)
휴.. 이렇게 두 가지를 불과 하루 만에 맛이 가게 만들어버리니.. 이놈의 덩치와 체중이 참 무서운 것이구나.. 새삼 느낀다. 그러면서도 구시렁거리시는 부모님께, '한번 깔아뭉개져 보실래요~'하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등산스틱아, 식탁의자야.. 그동안 참 고마웠다... 좋은 곳으로 가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