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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냥이 May 05. 2022

꽃을 든 남자

감사한 마음

  나의 남친은 꽃을 잘 선물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 더 많이 선물했었다. 항간의 소문에 의하면, 남자들이 기피하는 선물에 손꼽는 것 중에 하나가 꽃이라고 들었다.(남자들이 받기 꺼려하는 선물 중 하나)

나는 그런 얘기들에 개의치 않고, 내가 주고 싶을 때면 해바라기 한송이나 작은 꽃다발을 종종 사주고는 했다. 기억 속의, 꽃을 받은 남친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꽃을 받아 들었고, '왜 별로가.'하고 따져 묻는 나에게는 '아니 좋다.'라고 재빨리 대답했었다.

물론 이런 것도 내가 아프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몸이 아파서 일을 쉬게 되면서 데이트 비용의 대부분을 남친이 부담하고 있다. 우리는 사귀면서 서로 이직의 시절 동안 서로가 서로의 재정적인 부족함을 메꾸어주어 가면서 연애를 해왔다.

남친이 백수 시절에는 내가 소비를 많이 했었다.

  그러니, 한쪽이 백수일 때 상대방에게 재정적으로 의지하는 면이 생기므로, '꽃다발'같은 형편이 넉넉할 때 줄만한 선물을 기대하지 않게 된 것도 있었다.

그리고, 남친이 '선물로써 꽃을 사는 일'에 그다지 취미가 없는 듯 보였기에 강요하진 않았다.

'주면 받고 안 주면 말고~'하면서 꽃을 받아 보는 일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렇게 연애를 해왔다.


  오늘은 우리가 만난 지 3년이 된 날이다. 버스 정거장에서 그를 기다리는데 꽤 시간이 소요되어서 핸드폰에 글을 끄적이고 있던 중, 그 순간에 남친이 탄 버스가 도착했고 내가 그를 발견하기 이전에 그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깜짝스러운 꽃다발을 내밀었다.

받아보지 못한 '수국' 꽃다발이었다.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 들고 그와 거리를 걸으면서, 행복한 표정도 제대로 못 표현한 채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잠시 남친과 떨어져서 걸을 동안에는, 꽃다발이 마치 내 것이 아닌 양 배달하러 가는 사람의 모양새로 어색하게 들고 걷기도 했다.

  '수국이 꽃말은 별로던데.. 제일 예뻐서 샀다. 니 꽃말 많이 신경쓴다아니가.'라고 남친이 생색을 잔뜩 내면서 얘기를 한다.

찾아보니 꽃의 색깔별로도 꽃말이 다 다른데, 분홍색 수국의 꽃말은 슬프진 않고 꽤 괜찮은 편이다.

뭐, 꽃말이 그리 대수일까.. 오랜만에 꽃을 받아 드니 기분이 좋다.

남친은 또, '이거 들고 있으니, 버스에서 사람들이 다 쳐다보더라.'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을 때는 별생각 없이 흘려들었는데, 하루 종일 꽃을 들고 다니고 집까지 들고 오는 과정에서 회사 앞에서부터 나를 만나러 오기까지 계속 꽃다발을 들고 있었을 남친에게 새삼 고마웠다.

  아마 '가오'를 중시하는 경상도 남자들은, 꽃을 사는 것이나 꽃다발을 들고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울 아부지만 해도 여태껏 엄마한테 꽃 선물을 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디서 읽었던 글에서, 남자가 주는 꽃 자체도 고맙지만 그가 수줍게 꽃가게에 들어가서 꽃다발을 주문하고 가져오는 그 과정 자체가 감동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자들은, 대개 꽃다발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만.. 특별한 기념일에 달랑 꽃만 받을 경우에 조금 서운한 경우도 있다. 20대 초반의 나도 그랬었다. 아마, 생일 같은 날이었을 텐데 꽃다발만 달랑 주니.. 차라리 꽃다발이 아닌 다른 선물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꽃다발은.. 뭐랄까.. 아무런 특별한 날이 아닌데 받으면 더 행복한 선물이랄까.. 뭐, 이런 생각들도 나이가 드니, 그저 꽃다발을 받는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생겼다.


  이전에 남친은, 길거리 꽃가게를 같이 지날 적에 '꽃다발 사줘.'라는 나의 말에, '니가 꽃인데.. (생략)'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를 사소하게 짜증 나게 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즐겼는데..

한마디로 장난꾸러기에 고집불통인 면이 있다. 청개구리 같이, 해달라 하면 해주기 싫어하다가, 가만히 있으면 츤데레처럼 챙기니.. 몇 년간 사귀어보니 적당히 장단 맞춰주는데 요령이 터가는 것 같기도 하다.


  여튼, 오늘은 휴일이라 그런지 시내에 사람이 많았는데 거리에서 꽃다발을 든 여자와 남자를 한쌍 마주치기도 했다. 요새 보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에서 남성이 관심 있는 이성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행위로써 꽃바구니를 잔뜩 보내는 일을 하더라.

웃기게도 3년 전 오늘 남친을 처음 만난 날에 나는 내가 꽃다발을 사 갔었다.


  친한 친구의 꿈꾸던 프러포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꽃다발에 케잌을 받는 거였던가 그랬다.

그녀는 그렇게 첫사랑과 결혼까지 했고.. 나도 또한 원하는 그런 모습의 프러포즈를 받은 모습에 부러웠다.

그래도, 예전에 본 드라마 '프렌즈'에서 모니카가 챈들러한테 프러포즈하는 장면도 꽤나 멋졌다.

'Will you marry me?'라는 대사는, 영어이지만 참 설레는 말이다.

요새는 뜬금없이 결혼하자고 하는 경우는 드물고, 주위에 대부분 이들은 오랜 연애 끝에 이미 결혼날까지 다 잡고 나서 프러포즈를 기다리더라.

마치 천덕꾸러기 신세처럼 프러포즈를 안 해도 상관없지만, 안 하면 괜히 서운해서 보통 여자들은 언제 프러포즈를 받을지 벼르더라.. 물론 결혼 날짜는 잡아두고 말이다.

나는, 프러포즈가 본연의 의미를 발휘할 수 있는 프러포즈를 받고 싶다. 즉, 결혼 날짜까지 다 받아두고 프러포즈를 받는 것보다는, 프러포즈를 받고 나서 결혼식을 조금 뒤에 하더라도, 프러포즈 자체의 역할과 감동을 온전하게 느끼고 싶달까.. 뭐, 순서가 어찌 됐든 그 감동이 희석되기야 하겠냐먄..


  프러포즈 얘기는 이쯤 하고.. 다시 꽃 선물 이야기로 돌아가서.

꽃바구니나 꽃다발이 아닌, 한송이라도 참 사람의 기분을 좋아지게 할 수 있는 게 꽃 선물 같다.

부모님들의 프로필 사진 배경이 거의 꽃 사진인 게, 세월의 속절없는 흐름 속에서도 꽃을 그윽이 들여다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 아름다운 자태에 행복해지기 때문은 아닐까..

오늘,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계속 꽃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빠듯한 일정 뒤에 몸은 피곤해서 눈을 자꾸만 감았다 떴다 하는 와중에 눈앞에 꽃이 보이니 참 힘이 나고, 꽃이 참 이쁘고 좋더라. 수국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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