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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냥이 May 14. 2022

관심에 대하여

겉으로는 무심한 척

  쓰기 시작한 날: 2022.5.13.금.오전

  올린 날: 2022.5.14.토. 오전 서울행KTX 안


   산을 걷는 중. 이름 모를 초록의 식물들에게 보다 시선을 끌만한 화려하고 예쁜 분홍, 노랑, 빨강의 꽃에 더 많은 이들이 카메라를 갖다 대듯이,

숱한 세상의 관심과 화젯거리도 한정된 어떤 것에만 제한되어 집중될 거 같다.


  그럼에도 별다른 특색 없고 재미없는 나 자신이나 세상 속 어떤 누군가가 오롯이 홀로 고립되어 누구와의 교류도 끊은 채 쉬이 지낼 수 없는 것은, 원래 인간 자체가 고독한 존재이고 그것이 때로는 버거워서 그런 걸까.

  고독해 보이는 수행자들도 대부분 단체생활을 병행해야 하고 그 속에서 회의를 느끼지 않는 이상 완전하게 혼자 생활하시는 분들은 몇 없고, 따로 떨어져 계신 분이라도 자연의 동식물들과 소리 내서나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신다.


  외로움과 무언(無言)의 상태에도 내성이 생긴 다지만, 티브이 속 자연인 프로만 봐도 그들은 방송국에서 나온 살가운 연예인에게 자신의 속 얘기를 이내 털어놓고, (설정인지도 모르지만) 오랜만의 손님을 떠나보낼 때는 꽤나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뭐, 그들 중에는 방송 출연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개개인에게 필요한 관심의 정확한 척도가 있다면 나는 평균치에 비해서는 더 높을지도 모른다.

가까운 이들에게는 끊임없이 칭찬을 바라는 면도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게 꿀 바른말을 해줄 수는 없지만, 그런 불가능한 것을 때때로 바라기도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세상 누군가가 내 속마음을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일일 수도 있다.

진정 생각을 정리할 용도나 글을 쓰는 것 자체에만 재미 있다면, 혼자 일기장에 적고 말겠지만 이렇게 개방된 공간에 쓰면서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을 은근히 의식하기도 해서, 이렇게 쓰는 글도 완전한 날 것 그대로의 속마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아는 지인들과 교류하는 SNS(인스타, 페북 등)에서는 더 눈치를 많이 보니 그나마 브런치가 낫지만 혹여 친밀하게 느끼는 몇몇 작가님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할지도 모른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도, 내가 쓴 활자들을 스쳐가는 이들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만큼 대단하고 많이 아는 사람이다 하면서 글로써 이런 (누군가에게 인정과 공감을 받고 싶은) 마음을 드러낼 때도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머스럽거나 공중제비는 못 돌더라도 글 속에서는 활자들로써 어설픈 기교를 부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남의 시선이나 판단들을 지레짐작하며 불필요하게 정신력을 소모하기도 한다.

나는 겉으로인자하지만, 속으로는 고집 세고 누군가의 따끔한 잔소리에 이성이 금방 흐려져버리는 사람이다.

  당황스럽거나 난감한 상황에서 겉으로 애써 웃는 모습은, 스스로를 어찌하지 못하거나 방어하고자 하는 가면일 뿐이다.


  요약하면, 아직 어른이 못 되었다. 아마 남은 인생 동안에 그리 마음 넓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튼 난데없이 등산 초입부터 이렇게 '핸드폰 주절거림 삼매경'인 것은.. 왜 그런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위에 쓴 내용들이 윈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이만 쓰고 산을 더 올라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써볼까 한다. 대개 나는, 현실적인 부분을 따지는 일보다 실현하기 어려운 공상을 하는 것이나 감정적으로 파고드는 일이 더 즐겁다.


  이전에 '~같다'라는 말은, 확신하지 못하는 느낌을 줘서 글이나 말에서 안 쓰는 게 낫다고 들은 적이 있다. 나의 글에도 '~같다'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는데 대개 다른 데서 읽거나 들은 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에 쓰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요동치는 감정이나 생각들 글로 표현함에 있어서 그 통일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할 때가 많아서, 방어적이나 답답하게 보이는 면이 있어도 '~같다'라고 문장을 맺는 게 더 익숙하고 편하다.


  글이 이런 모양이듯 실제의 나도 우유부단하고 어떤 것에 대한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한다.

  마음을 독하게 먹는 일도 그래서 잘 없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하며

누군가 보기엔 실속 없이 그냥저냥 살아간다.


  엉뚱한 면도 많다. 괴짜 기질도 있는 것 같다.

되도않게 남의 눈치나 생각에 신경을 쓰기도 하지만, 한없이 내 위주로 생각해버릴 때도 왕왕 있다. 따지고 보면 남들에게 배려랍시고 하는 행동들이 도리어 내가 편하고 좋을 대로 해버리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음.. 예를 들면 국토대장정으로 하루 30여 킬로를 걸었던 때에 중간중간 휴식지에서 다들 앉아서 휴식을 취했지만, 체면불구하고 그저 '누워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아스팔트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이내 다른 이들도 한둘 따라 눕기 시작했다. 한국인은 역시 눈치의 민족이라 느꼈다. 병원 같은 데서 연습인지 실제인지 모르는 재난방송이 나와도 서둘러 대피하기보다 다른 이의 눈치를 먼저 보니..


  타인의 생각이나 시선에 대한 과한 의식을 하는 성가신 버릇은 유용할 때도 있지만, 조금 덜어내고 싶을 때도 있다.

  화장에 대해서 써보면,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을 대면해야 할 때는 아이라이너에 아이브로우, 팩트, 립스틱까지 신경 써서 외모에 공을 들이지만, 친한 사이일수록 화장의 종류가 하나둘씩 빠지고 그냥 선크림만 바르고 만난달까..


  전에 고작 3개월 정도를 만났던 이성은, 항상 불편했다.

그를 겨우 반나절 정도 보는 데이트를 위해 이른 아침에 돈 십만 원을 내고 아티스트에게 화장을 받아서 나갔을 정도였다.

그러니 내쪽에서 먼저 지쳐버렸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그는, 헤어질 때 내가 좋은 이유 중 하나로 '화장을 잘한다'는 것을 꼽았으니.. 웃기면서도 슬픈 일이었다.


  몇 년 전 어떤 시집을 좋아했다. 잘 기억나질 않지만,

시인의 성이 '류'씨였던 게 기억나서 잠시 교보문고 어플에서 찾아보니,

'지금 알고 있던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이다.

그 시절 책 커버의 시인 사진을 보고, '이 아저씨 참, 자유로운 영혼같이 보이네'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이 시집은 여러 국내외의 시를 엮어서 낸 시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찾아보니 '류시화 엮음'이라 되어있다.

아마 집안 어디 책꽂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집에는 이름 모를 누군가나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의 시도 꽤 있었다. 아마 그 시절의, '시(詩) 분야에 대한 오프라인 브런치' 느낌이랄까. 글의 키워드는, '인생', '생각', '삶' 이런 게 될듯하다.


  최근 교보에서 포인트를 받은 동생의, '책 살 거 없냐' 말에 이 시인의 신간을 사려했지만, '어차피 한 번 보고 안 볼 거잖아'라는 동생의 말에 그냥 영어공부 서적을 샀고 이것마저 몇 주째 방치 중이다. 동생의 말이 맞다.. 책을 사도 사는데서 끝이 나버린다. 만약 스마트폰이 없다면 책을 펼쳐보려나..


  돈벌이에 걱정 없이 책상머리에 종일 앉아, 자잘한 고민은 매일같이 많던 학생 시절에는 학업에 대한 일탈의 일환으로, 중학교 시절에는 하교하고 나서 서점을 기웃거렸고, 고교 시절에는 책상 한 편에 교과서적 외의 책 여러 권을 잔뜩 쌓아놓아서 학업에 지친 친구들도 몇 빌려보기도 했었다.(아마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책도 있었던 듯하다. 몇 권 되지 않는, '여러 번 읽은 서적' 중 하나이다.)

  이런 버릇들이 대학교 시절에도 도서관에서 책을 가득 빌려서 강의실 책상(학과 특성상 중고교의 교실과 비슷해서 강의실은 우리 학년 전용으로 한 곳이 있었다)에 어쩌면 교수님의 지루한 수업 중 딴짓을 가릴 용도로 책을 잔뜩 쌓아놓았었다.

  편입으로 들어온 곳이었지만, 치열했던 편입시험 이후 새로운 대학생활 중에도 동기들의 성적 경쟁은 치열했고, 족보 같은 게 있으면 서로 공유하기보다 감추기 바쁜 등 으레 있을만한 그런 대학생들의 모습들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는데, 단순히 '인생사에 대한 여러 고민들'이 담긴 책들을 나의 책상 위에 쌓아두는 것 자체로 그런 것들에 대한 반감을  소심하게 표현했던 것 같다.


   교내 도서관에서 대출한 도서는 대부분 읽지 않고 반납기간 내 반납하기만 바빴는데, 빌리지도 않고 학교 도서관 로비에서 삽시간에 읽어버린 책도 한 권 있었다. 그 책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는 책이었다. 지루했던 여러 기다림의 시간(아마 공강 시간이었거나 또는 하교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덜 심심하게 태엽을 감아준 고마운 책이었다.


  그러나 유튜브, 넷플릭스 같은 게 근래 몇 년 사이 대중화되면서 책은 멀어졌다. 활자를 읽고 상상하는 것보다 직접 영상으로 보는 게 천성이 게으른 탓인지 더 편했다.

책은, 그나마 예전에 하던 독서모임에서 모임날이 다가오면 그제야 억지로 읽어낼 뿐이었다. 최근에 자발적으로 구입한 도서도 오랜 기간 펼쳐보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


  책을 읽가지고 다니는 것보다,

가볍고 들고 다니기 좋은 핸드폰에서 브런치나 각종 영상들, 웹툰들에 빠져드는 일이 많다.

  지난날에 밤새 '오만과 편견'같은 로맨틱한 소설들에 빠져들던 나는 어디 갔는지.. (+아르센 뤼팽 시리즈들도..)


  당장 어젯밤도 넷플릭스 중 블라인드 러브 프로를 본다고 정신없었다. 요즈음엔 이렇게 현실을 적당히 가미한 프로그램이 볼만하더라.


  겉으로는 활자를 사랑하는 척, 종이의 질감이 좋다니 해도

책을 사는 것보다 풍광 좋은 카페에서 커피에 디저트 먹는 일이 더 좋아졌고.. 가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도 손대지 않고 있다가 반납하기 바쁘다.



  언제쯤 다시 책에 온전하게 빠져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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