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도 그 어떤 이유를 묻거나 의심을 가질 수 없는 것
누구에게는 가슴이 조각조각 나도록 아프고 시리기도 한 기억이 되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추억으로 웃음 짓게 하기도 하는...
그래.. 참 진부하다고도 느껴질 고만고만한 이야기... 그래서 참 펼쳐놓기 어려운 이야기...
나에겐 첫사랑이 있었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첫사랑은 죽기 전 생각나는 게' 진짜라고 하던 어느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조금은 서글픈 이야기지만, 사랑에 눈이 멀었던 그때의 콩깍지가 벗겨지고, 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게 진짜 사랑이었는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느 정도는 설득력 있는 말이긴 하지만, 뭔가 인간이 가진 간사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맘 한쪽이 편치 않다. 마치 예전 '무한도전' 클래식에서 에이스가 도전에 실패하면 '에이스가 아니였습니다~!'라고 하는 것 마냥, 지나간 씁쓸했던 과거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싶은 '잔머리'를 굴리려는 것은 아닐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라며 기억을 조작하고 외면하고 있다 하더라도, 내 의지를 넘어서는, 그래서 가슴으로부터 무너져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그런 기억이 있다.
그런 게 바로 '첫사랑'이다. 시간이 흘러도 그 어떤 이유를 묻거나 의심을 가질 수 없는 것...
난 사립 초등학교에 다녔다. 사립 초등학교의 각 학년의 반수, 그리고 각 반의 학생수는 일반 초등학교보다 그 수가 월등히 적었는데, 내가 다닌 초등학교의 경우, 학년당 4개의 반, 그리고 인원도 40명 안팎이었던 것 같다. 참고로 그 당시의 일반 초등학교는 학년 당 10~15개의 반이, 그리고 반마다 60~70명의 학생들이 넘는 학교가 대부분이었고, 그도 모자라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등교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수 탓에, 모든 학년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6년 동안 서로 꽤나 잘 아는 사이가 되는데, 심지어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같은 반을 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었다.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처음은 초등학교 4학년인 것 같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와 감정으로 그녀를 처음 봤던 그날, 그냥 나 혼자 시작한 것 같다. 그녀는 유독 머리와 눈이 너무나도 진한 까만색이었고 약간은 이국적인 외모가 묘한 신비감을 줬다. 하지만 난 소극적이고 서툰 아이였고, 어떠한 감정의 표현도 하지 못했다.
5학년이 되던 날, 그녀와 같은 반이 된 나는 혼자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25%의 높지 않은 그 확률을 이겨낸 그녀와 나는 '운명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수도 없이 생각만 했지 뭔가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섣부른 호감 표현이 우릴 어색하게 만들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운명을 거스를 순 없었던지, 우린 6학년도 같은 반이 되었다. 설레임과 긴장감이 묘하게 교차되던 6학년 첫날,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이유가 생각나지도, 그리고 또 이해가지도 않지만, 오늘 처음 같은 반이 된 짝꿍 A에게 일생 최대의 용기와 결심으로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마 그간 혼자 속으로 애태웠던 가슴속 비밀을 누군가에게 속시원히 말하고 싶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기 앞에 여자애 보이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아이야!”
친구 A는 망설임 없이 일어나더니 그녀에게 다가갔다.
"야! 쟤가 너 좋아한데~"
'.....!'
배신이다.
누굴 말리고 할 겨를도 없이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끄러웠던 교실엔 숨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정적이 흘렀고, 마치 시간은 멈춰있는 듯했다.
'숨고 싶다. 창피하다.'
내 일생일대 첫 번째 고백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것도 남의 입을 통해서 하게 된 거다.
세상이 까매졌다.
잠시 아이들의 놀림의 소리도 들린다.
저 멀리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의 모습도 보인다.
A는 그렇게 말하고 장난스럽게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과연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책상에 엎드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도저히 멈출 것 같지 않은, 터져버린 내 심장소리에 귀가 아파 계속 얼굴을 찡그렸다.
인생 처음으로 경험하는 외로움에, 철저히 혼자였던 그때, 누군가 나를 꼭 안아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내가 친구들의 놀림을 듣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내 귀를 꼭 막아 주었다. 그때 나는 사람의 몸이 참 따뜻하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었던 같다. 그리고 그 따뜻함은 가슴으로 전해져 치솟던 심장의 두근거림을 다독여 줬고, 천천히 안정감과 평온함을 찾게 해 주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B였다. 그리고 그도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된 친구였다.
세상 초라했던 나의 고백이 있은 후, 아이들도 그녀도 모두 일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나의 고백은 그 또래 아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 겪을 수 있는 그냥 해프닝일 수 있었으니, 더 이상 고개 숙일 필요도 창피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상처의 특효약인 '시간'이 해결해 준 것이다.
그날의 일에 대해 A에게 추궁하거나 시비를 걸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 녀석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천성적인 유쾌함 그리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친화력은 그를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날 왜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아줬는지 B에게도 묻지 않았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끈끈함으로 우린 이미 서로 단단하게 뭉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린 뗄레야 뗄 수 없는, '삼총사'가 되어갔다.
우리 모두는 그때 또래 아이들보다 굉장히 키가 컸었는데, 키 큰 3명이 아이들이 함께 같이 다니다 보니, 아이들의 관심도 꽤나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학교와 반의 중요한 일들은 우리가 도맡아서 했는데, 그 중심엔 항상 '사고(?)'를 치는 A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영어 발표 준비는 누가 해올래?"
"저요 저요~! 저희가 할게요!"
A는 항상 그렇게 적극적이었고, B와 난 대책 없는 그런 A를 보며 고개를 내저으며 웃기도 했다.
"니 혼자 하지 왜 우리까지 힘들게 하는 거야?"라고 B와 내가 푸념을 늘어놓을 때면,
"우린 삼총사잖아!"라며 은근 소속감과 남자의 의리를 자극하는 치밀함을 보이는 녀석이었다.
물론 모든 뒤치닥거리는 B와 내가 도맡아 하긴 했지만...
A는 무슨 모임을 만드는 것도 좋아했는데, 그가 주도한 "팝송 듣기 모임", "독서 모임" 등을 통해 우린 학년 내 여자아이들과 보다 친밀하게 교류할 수 있었다. 그는 모임 내 남자아이들은 우리 삼총사로 한정했고, 내가 좋아했던 그녀도 항상 모임 내에 있었기에 난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우린 '칼릴 지브란'과 같은 감성 자극하는 시를 서로 나누거나 교환하기도 했고 때론 '듀란듀란', '컬처클럽'파로 나뉘기도 했으며, 비틀즈의 'Yesterday'와 'Hey Jude'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여자아이들의 그룹도 우리처럼 삼총사가 되어갔다.
그날이 '독서모임'이었는지, '음악모임'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하지만 소나기가 하루 종일 변덕스럽게 내렸던 날인 건 분명하다.
B는 굳은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도 걜 좋아해"
'.....!'
배신이다.
난 교실 밖으로 뛰어 나갔다. 세상 둘도 없었던 친구로부터 오는 알 수 없는 배신감에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추적추적 오는 비를 맞으며 운동장을 걷고 있다 보니, 어느새 뒤따라온 친구 B가 뒤에 있음이 느껴졌다.
나와 친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 바라본 친구의 얼굴은 금새 왈칵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B의 충격적인 고백은 어린 내 가슴에 소리 없는 소용돌이를 일게 했다. 유치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마 난 그때, 우정이냐 사랑이냐를 두고 고민했었던 거 같다. 사실 둘 다 짝사랑인데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으련만, 그래도 남자답게 우정을 쿨하게 선택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피식 웃을 오만함이었지만, 그때만큼 내가 넓은 아량으로 세상과 친구를 대한적도 없는 것 같다.
우린 서로 "젠틀맨 서약"과도 같은 약속을 했다. 정확한 대화의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공정한 경쟁을 할 것' 그리고 '영원한 친구로 남을 것'이었던 것 같다.
세상을 삼키려는 듯이 운동장에 퍼붓던 소나기는 하나둘씩 느슨해졌다.
"야 너네 밖에서 뭐해?"
"아냐 이제 들어가~!"
교실 창문을 열고 우릴 부르는 A를 향해 서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우린 다시 뛰어 들어갔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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