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K-Pop 명곡 II, 백일흔둘

사랑해요, 박승화 : 1집 - 1993

by By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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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알고 있었잖아?


난 당황했다.


마치 수십 년간 숨겨온 내 치부가 세상에 모두 파헤쳐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친구 앞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목덜미 뒤로부터 시작된 땀방울이 등을 타고 내려와 허리춤 벨트 위로 축축이 고여가고, 친구의 매서운 두 눈은 서늘한 공기와 함께 내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했다.


뭐라 한참 동안 변명을 늘어놓은 것 같은데, 뭐라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벌써 20여 년이 훌쩍 지난 세월 앞에 녹슬어진 내 기억회로 구동의 문제인지, 애써 돌이켜 그때의 이기적이던 내 모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또 다른 내 자아의 처절한 몸부림 때문인지 그저 암흑 속에 답답하게 가려져만 있다.



친구에게는 오랫동안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여자친구가 없었던 나는 언제나 친절과 상냥함이 온몸에 배어 있던 여자친구의 밝은 성격과 친화력 때문이었던지 자연스럽게 오랜 시간 함께 어울리며 거리낌 없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우리 세명은 점차 둘도, 아니 셋도 없는 친한 친구가 되어 갔다.


그녀는 어느새부터인가 내게 가벼운 스킨십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친구로서 감내할 정도의 수준이고, 우정의 표현이라 생각했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나 또한 편하게 받아 줬다. 그런데 친구와 그녀가 말싸움을 한 뒤 날 찾아온 그날부터 무언가 미묘하게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술이 잔뜩 취해 있었고, 예전보다 더 편하게 날 대하기 시작했는데, 이상하리만큼 난 그때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난 친구를 급히 부르며 서둘러 자리를 파했고, 그 이후 우리 둘은 조금씩 어색한 관계가 되어갔다.


우리 헤어졌어


애써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지난 행동, 성격 등을 몰아세우던 그때, 그가 내게 넌지시 던진 '너 이미 알고 있었잖아'라는 말..


그녀는 내게 정식으로 고백한 적이 없다. 어쩌면 친구, 나, 그리고 연인 등이 얽혀있는 복잡한 삼각관계 속 아름다웠던 우리의 우정을 해치며 서로에게 상처주기 싫었을 테다.


하지만 난, 가끔씩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표정이나 눈빛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래... 친구의 말대로 난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아무 잘못도 없었던 내가 왜 평생 지울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친구를 대하고 또 미안해했는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작은 스킨십 하나에도 미친 듯이 뛰던 내 심장소리, 그리고 날 바라보던 그녀의 그 서글픈 눈빛만이 빛바랜 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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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포크의 계승자, 박승화 그리고 유리상자의 사진들


오늘 소개할 백일흔두번째 노래는 고백할 수 없었던 그때 그녀의 감정이 느껴지는, 김현철 작사/작곡/편곡의 박승화 데뷔앨범의 타이틀곡 '사랑해요'라는 노래다.


사실 이 노래는 데뷔 당시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곡이지만, 박승화가 유리상자로 듀엣을 결성하고 활동하면서 이후에 더 알려진 노래로, 1993년에 발매된 그의 1집 앨범은 본 숨은 명곡 시리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동아기획에서 기획했고, 김현철, 조규찬, 조동익, 함춘호, 손진태, 박용준, 장필순, 윤영로 등 당대 최고 뮤지션과 프로듀서가 총출동했다.


K-Folk의 명맥을 이끈 장본인


박승화는 1993년 데뷔이전 동아기획의 모든 앨범의 코러스를 담당했던 '코러스 장인'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고, 그의 솔로 데뷔 이후에도 그의 이러한 능력은 많은 동료의 앨범의 크레딧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아마도 그의 출중한 보컬 실력뿐만 아니라, 어떤 가수의 어떤 노래에도 잘 어울리는 그의 음색 또한 한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모든 곡에 잘 어울린다는 건, 냉정하게 뒤집어 보면 특색이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박승화는 1996년 동아기획에서 당시 솔리드의 소속사였던 서인기획으로 옮겨 2집을 발매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대중에게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고, 코러스 세션(백보컬)으로 활동하며 음악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솔로활동에 대한 어려움이 있었던지 이 시기부터 이세준과 함께 듀엣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 결성한 듀엣이 지금까지 박승화의 음악 커리어에서도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유리상자'이다.


유리상자는 1997년 1집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국 K-Folk를 계승하는 대표 밴드로 1집 '순애보'를 시작으로 '아름다운 세상', '신부에게', '사랑해도 될까요', '좋은 날' 등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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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화 솔로 앨범 표지들


귀를 사로잡는 김현철의 일렉피아노 노트 반복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박승화의 허밍, 어느새 다가온 손진태의 일렉 기타, 그리고 김현철과 박승화가 함께하는 좌중을 압도하는 코러스까지, 어쩌면 그 당시 우리 모두가 환호했었던 김현철식 발라드의 진수를 보여주는 전주가 지나가면, 수십 년 전 멀리 저 어디선가 차분히 날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원망 섞인 눈빛을 발견하게 된다.


나 이렇게 밖에 전할 수 없어도
그대는 이맘을 느끼나요


한참 동안 몸이 으스러져라 한기와 냉기를 뿜어대던 겨울의 바람이 조금 덜 차가워지는 순간, 햇빛이 창가에 오래 머무르는 어느날 오후, 이젠 거리의 나무들이 새로운 준비를 시작한 듯한 기척, 그 기척은 계절이 바뀌는 신호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 접어두었던 기억이 스르르 펼쳐지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그녀가 내게 살짝 비껴 보낸 웃음,

별것 아닌 내 말에 길어지는 시선,

사소한 안부에도 지나치게 성실했던 그녀의 말.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런가 보다”라는 이름으로 정리해 버렸다. 아니 눈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눈치가 너무 많아서 마음을 마주하는 순간 생길 우리의 어긋남과 상처를 생각하며, 나는 애써 그 마음을 보지 않기로 했던 것 같다.


이제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정을 지키기 위한 성숙이 아니라, 내 편의를 지키기 위한 독선이었다는 쪽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내 체면과 내 안전지대를 ‘관계’보다 앞에 두었기에, 누군가가 내게 마음을 준다는 사실이 고맙기보다 부담스러웠고, 그 부담을 감당하기보다 피하는 쪽을 택했다.


피하는 방식이 정중하다고 착각한 거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늘 한 발짝 뒤에 서 있었다. 결정이 가져오는 책임이 두려웠고, 책임이 내 삶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 두려웠다.


그 시간을, 그녀가 온전히 혼자 감당하도록 두었다.


늘 우린 이렇게 바라볼 뿐이고
힘겨운 눈빛을 보아도 아무 말 없어요


그때 이후, 그녀와의 연락은 닿지 못했다. 아마 연락이 왔더라도 이내 나는 거절의 의사를 명확히 했을 것 같다. 아직도 난 친구와의 의리와 우정이 더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다만, 그녀 혼자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다.

그녀가 그녀의 마음을 천천히 정리할 수 있도록, 천천히 다가가 꼭 안아주고 싶다.

나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큰 사랑과 상처가 있었기에...


춥다.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





사랑해요

박승화, 1집 - 1993


작사 : 김현철

작곡 : 김현철

편곡 : 김현철

노래 : 박승화


나 이렇게 밖에 전할 수 없어도

그대는 이맘을 느끼나요


늘 우린 이렇게 바라볼 뿐이고

힘겨운 눈빛을 보아도 아무 말 없어요


아무리 말해도 그대는 이해할 수 없어요

그대에겐 그 아무것도 아닌 걸요


내 마음 이렇게 그대에게 전할 수 없어도

사랑해요 그대만을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노래로 바로 이어집니다.)

https://youtu.be/XLBXqEUc4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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