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픔만큼 그대가 행복하길, The Classic : 2집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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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끼가 너무 미워,
근데 너무너무 사랑해.
벌써 몇 시간째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야, 너는 나이가 들어서도 왜 그러냐"
원래 술 취한 사람과는 아예 대화를 삼가라는 희대의 명언을 잊은 건 아니지만, 혀조차 가누지 못해 수천만 킬로가 떨어진 어느 외계인 행성 속 알 수 없는 문장을 중얼거리고 있는 오래된 여자 후배를 만났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나버린 후배와의 시간 속에, 우린 그리 자주 만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인연의 끈이 끊어질 간당간당한 순간이 오면, 내가 하던 아니면 후배가 하든 간에 최소한 안부를 묻는 수준의 통화는 했던 것 같고, 그 빈도가 적어지긴 했지만 가끔씩은 만나서 서로 하지 못했던 그동안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도 했다.
물론 정치/사회/문화의 관심사를 빼놓은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오래된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알 수 없는 믿음과 안도감 때문인지, 우린 직장이나 가족, 친구, 연애와 같은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과감히 털어놓기도 했다.
그녀의 연애는 대부분 짝사랑으로부터 시작해 올인하는 '헌신적 사랑'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날도 그녀는 자신의 연애담을 털어놓으며, '밉지만 사랑한다'라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모순의 극치를 담은 말들을 털어놓고 있었다.
"오빠는 그런 적 없잖아! 뭘 알아!!"
곧 취기에 잠이 스르르 들 것 같은 표정으로 쓰러져 가던 그녀는 무한의 '위로'를 건네는 내가 성의가 없어 보였는지 대뜸 날카로운 비수를 던져댔고, 이는 수십 년 전 바보같이 한 여자 앞에 서 있는 초라하기만 했던 내 모습을 소환하기에 충분했다.
짝사랑은
내가 만든 희대의 자작극일까?
좋아하는 마음은 늘 “내가 만든 이야기”처럼 취급될 때가 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너 혼자 앞서간 거라고.
더 이상은 바보같이 살기 싫어 안될 것 같아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꼭 한 번씩 내 손목을 잡았다. 그것도 아주 가볍고 아주 친절하게. 지푸라기라도 필요했던 내겐 그 조그맣고 보잘것없던 관심과 친절이 내 마음을 다시 제자리로 끌어당기곤 했다.
처음엔 내가 과민한 거라며, 자기 합리화의 최음제를 놓기에 바빴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원래 그럴 수 있다며 말 한마디, 눈길 하나, 우연한 연락에 의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갑작스레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의미로 하루를 버티고, 또 의미가 무너질까 봐 혼자 조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모른 척”을 했다.
좋아한다는 티를 내면 내 마음이 초라해지고, 혹시 상대에게 부담이 될까 봐... 하지만 사실은 거절당하기 두려워서 스스로를 단속했을 뿐이었고, 그녀를 향해선 그저 “그냥 친절한 거야.” “누구에게나 저렇게 해.” “넌 혼자 설레지 마.”라는 주문을 매번 되뇌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애매했고 애매함은 참 교묘하기만 하다.
분명히 “좋아해”라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의 온도까지는 너무나도 그럴듯하게 친절함을 전달했다. 내 어깨에 닿는 손이 오래 머물르기도 했고, 내 쓰잘데기 없던 허무한 농담에 유난히 크게 웃어줬으며, “너는 참 특별해” 같은 달콤함을 아주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게 내게 던지곤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특별하다는 말은, 사람을 쉽게 특별하게 만든다. 한 번 특별해지면 평범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나는 내가 특별해졌다고 착각한 채로, 평범한 하루를 견딜 수 없게 되어갔다. 나는 그녀라는 '마약'의 유혹에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소문처럼 들었다. 그 녀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 확실하지 않은 말. 확실하지 않은 근거. 하지만 나는 이미 확실하지 않은 것들에 내 인생을 걸어본 사람이었기에 그 이야기 하나로도 하루 종일 숨이 막혔다.
그리고 가장 비참한 질문 하나를 떠올렸다.
그는 네게 잘해줘?
오늘 소개할 백일흔여섯번째 숨은 K-Pop 명곡은 1995년에 발매된 더 클래식 2집에 수록되어 있는 '내 슬픔만큼 그대가 행복하길'이란 노래로 작사는 박용준과 조범구가 공동으로, 작곡과 편곡 그리고 노래까지 모두 박용준이 소화했다.
더 클래식은 1994년 김광진과 박용준이 함께 만든 레전드 K-Pop 듀오로 이미 본 숨은 명곡 시리즈에서는 김광진과 박용준 각각 솔로로 내거나 참여한 앨범의 노래로 여러 번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bynue/110
https://brunch.co.kr/@bynue/113
더 클래식 1집에 수록된 '마법의 성'이라는 노래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메가히트를 거쳐 전 국민의 애창 송이 되었고 이를 작사/작곡 노래한 김광진이 보다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얻게 되었으며, 또한 3집 이후 이어진 김광진 솔로 활동 때문에 '더 클래식=김광진'이라는 공식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더 클래식의 보컬이 김광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물론 앨범 내 많은 곡을 김광진이 불렀던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나 같이 너무 '반듯한 것'에 지루함을 느끼며 의외성을 좋아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겐 각 앨범마다 숨겨져 있는 박용준의 직접 부른 노래들이 빛나는 원석과도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참고로 박용준은 1집에 수록된 '그대의 향기', ‘문제아’, 2집의 '기행곡', '내 슬픔만큼 그대가 행복하길', 3집의 'Sera (in Las Vegas) 등을 직접 불렀는데 김광진의 노래가 비강의 구조를 적절히 활용한 단단하고 깨끗한 음색이라면, 박용준의 보컬은 큰 기교 없이 부르는 평범한 목소리이지만, 차갑고도 순수한, 또 여리면서도 내성적인 묘한 매력을 전달해 준다.
오늘 소개할 노래 '내 슬픔만큼 그대가 행복하길'은 오랜 기간 동안 서로 가까이에 있있지만 끝내 연인이 될 수 없었던 가슴 아픈 한 남자의 짝사랑을 그린 곡으로 가사 처음부터 끝까지 어쩌면 참 치졸하고 쪼잔했던 못난 내 어린 날의 모습이 그대로 똑같이 담겨있는지, 들을 때마다 메어오는 가슴을 진정하기 바쁘기만 하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계 초침소리와 같이 느껴지는 퍼커션의 연주와 특별한 멜로디는 아니지만 담담하고 은은하게 퍼지는 일렉피아노로 시작되는 노래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English Horn의 연주와 함께 박용준의 절제된 순수한 보컬이 꼭꼭 잠궈 놓았던 그녀와의 마지막 그때로 날 마주서게 만든다.
왜 나한테 잘해줬어?
그냥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끝내고 싶었다. 나에게만 그런 건지, 누구에게나 그런 건지가 뭐 그리 대단하고 중요한 문제 일까도 싶었지만, 만약 누구에게나 그랬다면, 나는 특별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상처받겠지만, 동시에 해방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그 행동을 ‘나에게 주는 신호’로 해석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동시에 나는 두려웠다. 그 결론이 나를 자유롭게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자유가 무서웠다. 왜냐하면 자유는 나에겐 진정한 관계의 “마지막”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끝나지 않는 고통이란 괴롭더라도 내일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마지막 고통은 더 이상 “언젠가”라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을테니까.
그건 네가 그렇게 느낀 거야
“그에겐 더 잘해 주길 바래”
나는 아직도 그녀가 행복하길 빈다. 하지만 이젠 그 작은 응원이 내 초라함의 영수증이 아니었으면 한다. 그건 누군가의 행복과 맞바꿔야만 의미가 생기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히 아프고,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감정이었으니까.
작사 : 박용준, 조범구
작곡 : 박용준
편곡 : 박용준
노래 : The Classic
아직 아무도 몰라요 그대가 날 어떻게 만든 지
혼자 좋아했지만 모른 척한 건지 어떤 건지
자꾸 멀어질 때면 그 안타깝던 나의 마음속에
전화는 왜 했었나요 그대가 원한대로 되기 힘들잖아요
가끔 보면 내가 있을 자리가 왜 비지 않았나요
내 생각은 하나요
지금 내 슬픔만큼 그대가 행복하길 빌어요
내가 걱정한 만큼 그는 당신께 잘해주나요
자꾸 멀어질 때면 그 안타깝던 나의 마음속에
전화는 왜 했었나요 그대가 원한대로 되기 힘들잖아요
가끔 보면 내가 있을 자리가 왜 비지 않았나요
내 입장은 아나요
처음부터 왜 잘해주었나요 다른 사람에게도 언제나 그런가요
내 곁에서 그대가 없어지면 다시 볼 수 없다면 차라리 더 낫겠죠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노래로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