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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phapha Jan 03. 2020

낙서한다. 온 마음으로 온 벽에

아이와 낙서하며 추억한 나의 그림 낙서들

다음 주에 친구 부부가 집으로 놀러 온다고 했다.

묻지도 않았지만 미리 카톡으로 우리 집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집 벽이 말이야. 얘랑 나랑 온통 낙서하고 놀아서 귀신의 집 같으니까 놀래진 말고"

처음엔 큰 맘먹고 아이방을 내주었다.

동생과 조카들이 놀러 왔을 때 낙서하고 놀고 그러다 지우고 놀기도 하라고.

그림은 그리되, 연필로만 그리라는 제약을 걸었던 청정하지 못한 제안이 낙서라는 자유로움을 억제하고 있었나 보다.

아이들은 연필로 벽 한쪽을 채우긴 했지만, 아이가 그 이후로도 더 이상 낙서를 하며 놀지는 않았다.  





아이와 나는 우리만의 작품을 만들면 꼭 전시를 하고 발표하는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는데, 

처음 시작은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에 낯가림이 심한 아이가 말을 하기 어려울까 봐 시작한_ 그러니까 일종의 우리만의 게임이었다.

그 발표는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블록이든, 색종이든 각자 무엇을 만들어도 왜 만들었고 이게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작품이 걸리는 장소는 베란다 창문 정도였다가 본격적인 낙서가 시작되고부터는 확장되었다.


이유인즉, 주택가가 빼곡히 늘어선 집 골목골목을 다니며 남의 집 담벼락과 바닥에 돌멩이로 꾹꾹 눌러며 그림을 그렸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였다.

'아이들의 낙서는 놀이만큼이나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놀았는데, 그림을 꼭 책상 앉아서 그려야 할까' 하는 생각들이 들자 내친김에 식탁 뒤 거실벽에도 그림을 남기기로 했다.

'어차피 도배도 안 하고 이사 온 집 그냥 마음대로 그려보면 어떨까? 인테리어는 나중에 제대로 해버리지 뭐'

우리 집의 빈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아이와 내 이야기가 그림으로 남아 이 집을 채우게 되면, 이사할 때 눈물이 나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지낸 지 3년 차, 이제는 인테리어 욕심은 사라지고, 지금은 아이가 원하는 곳에 낙서로 채우고 있다.  







낙서를 하고, 아이의 행동에 제약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자 아이는 그림에 있어 더 자유분방해졌다.

거침없이 그림을 그리고 어떻게 그림을 그리든 스스로 만족해하며 뿌듯해했다.

연필이 아니라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보도록 시도하자 아이는 손이든 발이든 물감을 발라 마음 가는 데로 그림을 그렸다.

아이가 쉽게 꺼낼 수 있는 공간에 미술도구를 주고, 잘 나오지 않는 펜들은 과감하게 버렸다.

아이는 하원하고 그림을 습관처럼 그렸고, 간혹 내가 그림에 대한 후한 평을 하면 나에게 그림을 팔겠다며 100원을 받아가기도 했다.




처음에 빈 벽을 내주었을 때에는 아이의 창의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아이가 엄마도 함께 그리자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그런데 빈 벽 앞에서 나의 창의성은 아무리 끄집어내려고 해도 나오지 않았다. 넓은 벽 앞에서 붕떠버린 기분이었다.

뭘 그려야 할지 몰라 처음에는 그냥 색연필로 선을 마구마구 그렸다.

신기하게도 여러 선들이 겹쳐지고 넓게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쾌감이 느껴졌다.

내 안에 엉킨 실타래 같은 감정들이 색연필 끝에서 끝도 없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은 '무엇을 그릴까'보다는 '그냥 색연필이라도 그어보자'라는 마음으로 맹렬히 선을 그어댔다.




아이와 낙서를 시작하면서 한동안 잊고 지낸 나의 그림들이 떠오르며 다시 펜을 잡아볼까 하는 욕심이 들었다.

나와 타자들이 발로 그린 그림이라고 인정하며 웃었지만, 이 그림으로 그 순간은 즐거워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말이다.

창의력이 멈춰있는 지금에서야 그 낙서들이 나를 위한 분화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매일 A4용지를 꺼낸다.

뭐가 되었든 그냥 종이 앞에 멈춰 서서 뚫어져라 종이를 바라보고는 내가 이 위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림을 배운 적은 없지만 자꾸 그림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는 것은 아직 시도도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끝까지 마무리해본 적도 없는 낙서에 대한 미련 아니었을까.

아이 덕분에 나는 다시 낙서를 시작했다.




@byphapha  


@ 매일의 아빠 byphap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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