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살다

by 로움

나에게 있어 슬픔을 건너는 최선의 방법은 책 읽기였다.

내가 이름 붙이지 못하고 몸속 어딘가에 쑤셔 넣어두었던 감정들을

타인의 문장에서 발견하는 일은 무척이나 안심되고, 그 어떤 것보다 위로가 되었다.

그냥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다는 인정을 받는 것 같기도 했다.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나는 그냥 읽는 자로만 있으면 되었다.

나를 둘러싼 상황과 연결되지 않아도 되는, 오직 문장 속에만 존재하는 시간.




활자로 인쇄된 고통은 안전하다.

내면에서 형체 없이 일렁이던 비명이 종이 위에 검은 잉크로 박제되는 순간,

그것은 비로소 해석 가능한 언어가 된다.


언어를 얻은 감각은 막연한 무게와 다르다.

납득이 된다.

납득이 된다는 것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안의 슬픔은 어둡고 거대한 암석 같았다.

그것을 문장의 정(釘)으로 조금씩 쪼아낸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깎여 나가고,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작아진 슬픔의 조각은 내 쇄골 아래나 옆구리 어딘가에 가만히 밀어 넣는다.

그것은 이제 내 몸의 일부, 혹은 가구처럼 놓인 고요한 존재가 되어 나와 같이 살아간다.




슬픔을 통과하지 않은 기쁨은 투명도가 낮다.

채도가 낮은 방에 오래 머문 자만이

창틈으로 새어 드는 찰나의 빛이 얼마나 눈부신지를 안다.


그렇다고 해도, 슬픔을 환영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나를 엄습할 때, 도망치는 대신 책장을 넘길 뿐이다.

종이가 살에 닿는 서늘한 촉감을 느끼며,

내 몸속에 새로이 자리 잡을 슬픔의 위치를 가늠해 본다.


오늘 내가 읽은 문장은 내일 내가 살아낼 뼈가 된다.


그저, 읽고 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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