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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은성 Nov 13. 2020

법률사무소에서 3일 일했다

자아 그리고 아빠

춤을 그만두고 방황했던 시절들이 떠오른다.


방황을 하면서도 춤을 놓지 못해 예술가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고 어느 순간 놓아버리고 일에 찌든 회사생활을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항상 마음은 창작자가 되고 싶었나 보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잊었던 춤을 다시 추고 싶어 레슨을 듣기도 했고 한쪽 구석에서 꿈꿨던 음악가가 되고 싶어 미디 개인 레슨을 3개월 정도 받기도 했다.


결국 나는 돌고 돌아 모든 것을 그만두고 나를 찾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지금이 딱 그 시기이다.



춤을 그만두고 정말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한 번은 법률사무소에서 잠깐 일했었다. 아빠의 사촌 형, 나에게는 당숙이신 분이 미국 변호사였는데 한국으로 들어와 로펌을 차리셨다. 그 당시 보이스피싱이 기승을 부릴 때라 일손이 부족해 아빠에게 부탁한 것이다. 딸들 쉬고 있으면 단기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냐고.


언니는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나는 집에서 쉬고 있었다. 아빠는 나한테 제안을 했지만

사실 관심 있는 거 빼고는 정말 다 관심이 없던 나는 변호사 사무실이라는 것 빼고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아빠는 나중에 이력서 쓸 때 한 줄이라도 법률사무소에서 일한 이력이 있으면 도움이 될 거라며 경험 삼아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집에서 노느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아빠 말대로 경험이니 해보자 하는 마음도 있었기에 알겠다고 했다.




며칠 뒤 첫 출근 날.

사실 그때도 나에게는 예술가, 댄서가 전부였기에 출퇴근이라는 단어 자체도 생소하고 조금은 오글거렸다. 출근을 하자마자 아빠와 비슷하게 생긴 아저씨를 사무실에서 마주했다.

아, 이 분이구나. 유전자의 힘은 정말 놀라웠다.

(아빠랑 너무 닮아서 놀랐다)

네가 은혜구나, 많이 컸다, 몰라보겠다, 학교는 어디 다니냐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하게 됐다.


보이스피싱 때문에 피해 본 사람들이 집단으로 소송을 걸게 된 일을 맡게 되셨고 내가 해야 할 일은 피해자분들의 통장사본을 보고 피해금액을 알아내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액수는 천차만별이고 건수는 어마어마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서류 봉투만 내 키만큼 쌓여있었다. 처음 접하는 서류들과 내가 제일 싫어하던 숫자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내가 숫자 한 개라도 잘못 입력하면 피해금액이 달라지는 것 이기에 더욱 신경 쓰였다.


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루는 피해금액을 뚫어져라 보느라 시간을 다 보냈고 그다음 날에는 내 자리가 생겼더랬다.

난 아르바이트생이고 여기서 오래 일할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내 자리를 만들지?라는 생각과 부담이 함께 왔다.


거기서 일하시는 여자분이 (직책을 몰랐었다) 내 자리를 안내해주고는 컴퓨터에 메신저를 깔아주고

이렇게 얘기했다.



"앞으로 용무 있으면 이 메신저로 쪽지 보내면 돼요. 전화 오면 나한테 넘겨주거나 연락처 남겨달라고 하면 되고요."



메신저? 전화?

나는 회사생활 한 번도 안 해본 춤추던 예술대 학생인데. 이게 다 뭐람. 엑셀도 취업준비도 토익도 평범한 대학생들이 하는 것들을 나는 한 번도 안 해봤단 말입니다. 허허..

그리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지 취직을 한 게 아닌데 왜 내가 이런 것들을 해야 할까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여자분은 나에게 또 말했다.



"아 그리고 손님 오시면 탕비실 저 쪽에 있으니까 커피나 음료 가져다 드리면 돼요."



?

제가요? 왜요?

나는 단지 일손이 부족해 온 단기 아르바이트 생인데 왜 커피까지 타야 하죠?

특히나 그때는 자존감도 자존심도 높고 셀 때라

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일단 대답을 하고 내 자리라는 곳에 앉아서 어제보다 만 통장사본을 보고 있는데 손님이 온 것이다.


여자분은 나한테 커피를 타오라는 듯한 눈짓을 했다. 순간 벙 쪄있는데 그런 내게 당숙분이 커피 두 잔만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탕비실로 터벅터벅 들어가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붓고 뜨거운 물을 휘휘 젓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의뢰인인 듯한데 그 당시에는 친구인가 지인인가 생각했던 거 같다. 나이 때가 비슷한 아저씨여서 단순히. (생각이 얼마나 어리고 몰랐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도 계속 생각했다. 아무런 존재 이유가 없는 그곳에 왜 있어야 하는가. 단순히 경험 때문이라도 일적으로 보탬이 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닌 거 같고 가만히 앉아서 숫자만 보며 시간을 축내는 것 같고 실수해선 안 되는 부담감도 크고. 뭘 하든 잘하려고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나에게 무리가 되는 일이었다.

첫 단추부터 순서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이해가 가지 않으면 열심히 할 이유가 없기에.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없는 일이기에.


차근히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설명을 잘해주었다면 내 일은 이러이러하다 라고 말을 해줬더라면.

지금의 나이였다면 그래도 조금은 더 일했을 거 같다.


23살의 나는 버티지 못했다.

내가 일반대학교 학생이었다면 가능했을까? 글쎄.


버스 안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전화가 왔다.


"아 은혜야 나 당숙인데~ 내일 출근할 거지?"


퇴근하기 전 울먹거리는 내 표정을 보셨는지 전화로 확인을 하셨다. (아니면 몇 명이 도망갔나)

이때다 싶어 나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없고 부담스럽다고. 잘 모르는 일이라고.


그래도 계속 날 설득하며 단순한 일이라고 괜찮다고 말하셨다. 일손이 많이 부족했나 싶긴 했지만 굳이 내가 하는 일이 많지도 않다고 생각해서 썩 내키지 않았다. 왜 날 붙잡을까.


다음날이 되어 일단 출근을 했다.

당숙분이 날 사무실로 불렀다.


불러놓고 하시는 말씀이 처음엔 잘 못 알아들었지만 그 안에 내포된 말들은 본인 자랑과 역사, 여기서 일하면 나에게 남을 커리어 등을 운운하며 우리 아빠도 똑똑했는데 그렇게 돼서 불쌍하다고 했다.


결론은 내가 능력자고 여기 일하면 좋을걸?이라는 뜻과 함께 아빠를 비아냥 거리며 나를 설득했던 것.


그럴 바엔 나 따위를 쓰지 말고 공채로 뽑지 왜.

그리고 불쌍이라는 단어를 내 앞에서 왜 쓰는 건지.

사리분별 가능한 어른이라면 딸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순간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게 이유가 된다고? 나를 설득하는 이유가 저 모양 저 꼴이라니. 내가 변호사가 될 것도 아닌데 무슨 커리어가 필요하고 이 대한민국 땅에 본인보다 훨씬 더 유능한 법률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더 화가 났던 건,

그 당숙이 집안 형편이 좋아 공부할 수 있었고

우리 아빠는 똑똑해도 중졸이라는 것이다.


우리 아빠가 똑똑하다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익히 알고 있던 것인데 지금도 아빠는 역사부터 경제까지 모르는 게 없는 분이다. 퀴즈야 놀자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셨는데 답을 대부분 맞히셨고 궁금한 역사를 물어보면 도깨비방망이처럼 정답을 뚝딱 하고 말하시곤 했다. 도대체 아빠는 대학도 안 갔는데 이런 지식은 어디서 얻었냐고 조금 커서 물었을 때 책을 그렇게 많이 보셨다고 했다. 할머니가 못 보게 해도 몰래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고 하셨다.

아빠의 꿈은 교수님 선생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를 졸업하고 기술을 배워야 했고 그 기술로 평생 우리를 키우셨다.


이런 아빠를 내가 너무 잘 알았기에 화가 나서 당숙에게 소리쳤다.


"우리 아빠도 배웠으면 그 자리에 앉아있을 거예요. 아니, 아마 더 유능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소리치고 나와 복도에서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 안 하겠다고. 못하겠다고. 나랑은 안 맞는 일인 거 같다고.

내 예상에 화를 낼 것 같던 아빠는 알겠다고, 그만두라고 말했다.


참고하라고, 왜 그것도 못 버티냐고 말할 줄 알았는데.


가방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당숙에게 또 전화가 왔다. 나한테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고 내일 나오라고 하는 설득 전화였다.

나는 나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밤에 아빠를 만났는데 아빠한테도 전화를 해서

은혜 설득해서 나오게 해달라고 말했단다.

대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끈질기다 끈질겨.

아빠한테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생각해 볼 생각 없으면서.


그때 상황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다.

글을 쓰다 보니 그때의 느낌도 생생히 와 닿는다.


어린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지, 그때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거 같다.


세월이 지나 30대가 되고 보니

미성숙했던 부분, 잘 몰라 당황했던 부분은 나의 부족함이지만 아빠를 불쌍한 사람 취급하며 어린 내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해대는 어른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내가 일적으로 정말 필요했다면 체계를 잡아 잘 가르치면 될 일인데.


그때 하나는 확실히 알았던 거 같다.

의미 없이 존재가치 없이 돈을 받으며 일하는 것은 나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나이만 먹은 어른이 덜 된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 20대 후반쯤,

아빠랑 맥주 한잔 하면서 자세히 말했었다.

아빠는 놀라며 그렇게 말했던걸 왜 이제 말하느냐고 했다.


"말해봤자 달라질 건 없는데 뭐하러 말해. 난 그 얘기 듣는 순간 그 사람 밑에서 일은 못하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볼 땐 당숙보다 아빠가 훨씬 똑똑한 사람이야."


"아이고, 우리 딸 다 컸네. 이건 좀 감동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쉬움? 감동적?


아마도 공부를 하지 못했던

그 상황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마음 놓고 공부하는 게 꿈이던,

컴컴한 방에서 혼자 몰래 책을 보던

중학생 본인을 회상하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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