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하는 게 당연해서 너무 좋아!
흰띄 무 그랄이란, 주짓수에 처음 등록한 사람의 띠 상태를 말한다.
다른 도복운동은 대부분 흰띠-노란띠-초록띠-파란띠-검은띠 처럼 띠의 색이 몇 달 간격으로 바뀌어 1년쯤 되었을 때 검은띠 초단, 그 뒤로는 심사에 따라 2단, 3단으로 단이 쌓인다. 주짓수도 흰띠-파란띠-보라띠-갈색띠-검은띠라는 승단에 따른 띠의 색 변화가 있지만, 띠와 띠 사이에 4단계의 그랄이 있다. 처음 흰띠는 무 그랄(그랄 없음), 첫 승급을 하면 1 그랄, 그리고 그랄이 하나씩 쌓여 4 그랄이 되면 그다음 승급 때 다음 띠인 파란띠로 승단한다. 모든 것이 잘 풀렸을 때를 가정하면 그렇다. 주짓수 검은띠는 최소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첫 유색띠인 파란띠는 보통 2년 정도 소요된다고 하고, 그래서 주짓수의 파란띠는 다른 운동의 검은띠로 생각하면 된다고 친구가 알려줬다. 그렇게 파란띠는 나의 단기 목표가 되었다.
흰띠 무 그랄 라이프는 평온했다. 모두 나를 신생아를 보는 눈길과 손길로 돌봐주었다. 도장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나의 첫 달은 그저 신나고 재미있고 행복했다.
무그랄의 최고 장점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거다. 내가 진짜 못하는데, 그래도 된다고 우주가 나를 보듬어주는 기분이다. 모두 내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못하는 게 죄가 아니고, 심지어 나도 이렇게까지 못하는 내가 신기할지언정 밉지는 않다. 관장님도 자꾸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쉬라고 하신다. 뒷구르기 잘 못 한다? 지금은 쉬고 이따 남아서 연습하세요. 이 기술이 안 된다? 이건 나중에 하고 아까 했던 거 한번 더 하세요. 스파링 안 해봤죠? 이쪽에 앉아서 사람들 하는 거 잘 보세요.
내 손과 발은 지긋지긋하게 안 맞더라도 내 몸과 마음 사이의 갈등은 없고, 나에게 기대하는 게 없는 선배들과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는 나의 사이도 좋은, 꽤 아름다운 시기다. 별 거 안 했는데 숨이 턱까지 차는 일이 많기 때문에 실컷 운동한 기분은 충분히 낼 수 있다. 주짓수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각종 부상도 아직 별로 없다. 불평할 게 없는 시기인 것이다.
종일 책상과 모니터를 벗어나기 힘든 재택근무를 마치면, 태권도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초등학생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외투 안에 도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도장에 도착하면 외투와 양말을 벗어서 개켜두고 초보답게 한쪽 구석에, 주로 셀카를 찍기 좋은 거울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관장님의 지휘에 따라 몸을 풀고, 그날 같이 연습할 파트너를 찾고, 기술을 배우고, 기술 반복연습을 하고, 포지션 스파링과 탑가드 스파링을 하고, 마지막에 일반 4분 스파링을 파트너를 바꿔가며 서너 번 한다. 다 같이 모여 마무리 인사를 하면 수업이 끝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질문을 하거나 스파링을 더 하기도 한다.
스파링은 자유 대련인데, 포지션 스파링은 시작하는 포지션을 미리 정해두고 그 포지션이 풀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한된 스파링이고, 탑가드 스파링은 서서 시작하는 탑 역할과 앉은 자세에서 시작하는 가드 역할을 미리 정하고 하는 제한된 스파링이다. 포지션이 풀리거나 탑가드가 바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때문에 일반 스파링보다 숨을 돌릴 틈이 더 많다. 그렇다고 안 힘들다는 건 아니다. 스파링은 다 힘들다. 못할수록 기술보다 힘에 의존하기 때문에 더 힘들다.
아직 스파링이라는 물가에 내놓을 수 없는 왕초보 무 그랄은 기술 연습이 끝나면 선배들의 스파링을 구경하는 경우가 많다.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몸에 익힌 기술이 없기 때문에 스파링을 하더라도 상대의 기술 연습용 더미가 되어주거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해서 낑낑대며 누르고 있는 게 고작이다. 아직 주짓수라고 부르기엔 입은 도복만 주짓수스러운 활동이지만 나처럼 하루 동안 쌓인 울분과 체력을 소진하러 온 사람은 충분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때만 해도 하루에 두 타임을 해도 무리가 없었다. 역시 스파링을 안 해서 그랬던 것 같다. 기술은 배워도 배워도 몸에 장착되지 않고 돌아서면 잊혀졌다. 그리고 다음번에 같은 기술을 다시 배울 때 자책할 이유가 되어 돌아왔다. '분명히 저번에 배웠는데 왜 기억을 못 할까'라는 의문은 점점 화병으로 진화한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행복의 무그랄 나라에서 1 그랄의 나라로 끌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