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는 파란띠 (5) - 흰띠 1 그랄의 슬픔

1 그랄을 슬프게 하는 것들

by bythewind

처음 온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이 있다.


도장에 당일 체험을 왔거나 등록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사람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관장님이 특별히 챙기시기도 하고 내가 대부분의 관원 얼굴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단서가 없어도 알 수 있다.


세 달 전의 내 얼굴이기도 한 이 얼굴은 낯설음과, 두려움과, 호기심과, 쫄아있음과, 신기함과, 당황스러움을 조물조물 무쳐놓은 얼굴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뒷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다. 엉거주춤 사지를 정렬해 놓은 모습만 봐도, 앉아있어도 서있어도 알 수 있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긴 했지만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생경한 우주에 요만큼도 적응하기 전에 그저 보이고 들리는 것을 흡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인 상태.


이런 사람을 보면 1 그랄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알려주고 싶은 게 너무 많다. 탈의실 문은 안으로 당겨야 잘 잠기고요, 화장실 쪽 대리석 계단에 부딪히면 안 되니까 그쪽 말고 이쪽에 앉으시고요, 정수기 쓰시려면 종이컵에 이름 꼭 쓰세요, 가실 땐 잊지 말고 종이컵 버려주시고요. 띠가 자꾸 풀리네요, 이렇게 묶어보세요. 안 넘어지려고 버티지 마시고 그냥 넘어가셔야 덜 다쳐요. 이렇게 넘기는 걸 스윕이라고 해요. 뒷구르기 못하시면 오늘은 하지 마세요. 손톱발톱은 아주 바짝 깎아주시는 게 좋아요. 이 기술은 왼다리는 여기에 걸고 오른 다리는 허벅다리 위에 두고 손으로 칼라를 잡아야 하는데 잠시만요, 어느 쪽이더라...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다 보면 문제가 있다. 나도 '어제까지 왕초보였던 그냥 초보'라는 이슈 때문이다. 왼 다리를 골반에 올렸으면 손으로 상대 칼라를 오른쪽을 잡았더라, 왼쪽을 잡았더라? 상관없나? 근데 아까 관장님이 시범 보여주실 땐 한쪽만 잡으셨던 거 같은데. 아까 내가 할 땐 자연스럽게 됐는데 왜 설명하려니까 헷갈리냐. 왜긴, 나도 초보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를 다독일 겸 양심고백부터 하자면, 이 이슈는 파란띠인 지금도 곧잘 발생한다. 왕초보에서 초보로 진화한 후에도 쭉 왕초보 상태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그게 단호한 사실이다. 언제까지일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그랄이 있든 없든 나는 그대로 나구나, 여전히 할 줄 아는 게 없구나, 그래도 괜찮아,라고 마음먹는 게 좋다.


왜냐면 이게 1 그랄의 슬픔이 태어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랄이 생겼지만, 후배도 생겼지만, 나는 아직 매우 초보고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아는 것도, '내가 아는 게 아는 게 아닌' 정도로만 아는 게 대부분이다. 이게 안 괜찮으면 매일매일 슬플 일이 많다. 1 그랄 되었다고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아니,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평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다음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첫 그랄을 다는 것과, 1 그랄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1 그랄의 실력을 갖추려면 멀었는데, 어느날 문득 정신 차려보면 내 띠에 그랄이 두 개, 세 개... 흐아아악. 난 아직도 제대로 쓸 줄 아는 공격 기술 하나 없는데!


이렇게 어제의 왕초보, 오늘의 그냥 초보는 신규 관원에게 해주고 싶은 건 많은데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는 마음만 따뜻한 선배가 되어 1 그랄의 세계로 한 발짝 더 깊숙이 발을 디딘다. 그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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