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랄을 자책하게 하는 것들
본격적으로 1 그랄의 세계에 입장하면 예전엔 몰랐던 자책과 울분이 기다리고 있다.
그랄을 하나 달고 나면 매일 도장으로 향하는 길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고 가슴에는 주짓수에 대한 애정이 솟구치는 그런 기분에 휩싸인다. 도복을 아주 잘 보이는 곳에 걸어서 말리게 되고, 한 일주일 정도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희열에 주짓수와 관계없는 일상마저 달콤하다. 당연히 만사를 제쳐놓고 매일 수업을 들으러 가게 된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다 보면 도장에 가는 게 즐겁고 수업도 재밌지만 왜 내 실력은 이렇게 안 느는지 내 멱살을 잡고 싶은 답답함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등록한 지 얼마 안 되는 다른 친구의 날렵한 몸놀림도 유난히 눈에 걸리기 시작한다. 쟤는 왜 저렇게 처음부터 잘해? 나랑 같이 첫 그랄을 받은 다른 친구를 보면서도 주눅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1 그랄 중에 내가 제일 못하는 거 같아!
삶은 다양하고 복잡한 불공평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가를 할 때도 매일 출석해서 고통을 참고 몸을 늘려도 남들보다 유연해지지 않았고, 연예인 식단을 따라 한다고 연예인 몸매가 되지 않았다. 일을 더 한다고 회사가 나의 노고를 더 알아주지도 않는다.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고 결과가 비례해서 나오지 않는다. 주 5일 주짓수 도장에 출석해서 하루에 두 타임씩 열정으로 참석해도 지난주에 온 무 그랄 친구가 오늘 처음 배운 기술을 나보다 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남지는 않는다. 어제의 나보다 유연해진 몸은 요가의 초점을 호흡과 명상으로 옮기는데 큰 도움이 됐고, 나에게 맞는 식단을 찾는 여정은 나와 반대편의 극단적인 몸을 가진 연예인을 따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배웠고, 팀원을 배려하는 마음을 알아보는 동료와 특별한 우정을 쌓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근무가 끝나면 도장으로 향하는 습관이 생겼고, 어느 시간대에 가도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나보다 주짓수를 늦게 시작한 친구가 오늘 배운 기술을 나보다 잘하는 것 같을 때 마음이 좋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의 크기는 내 질투심보다 작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큰 의미를 두어봐야 좋을 게 없다. 빨리 받아들이면 된다. 이해가 안 되면 외우면 된다. 실력은 시간 순이 아니다. 아무것도 공평하지 않다. 그래도 괜찮다. 모든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주짓수는 필라테스나 헬스처럼 몸을 정렬하고 만드는 운동이 아니라 지금의 몸을 활용해서 이 게임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운동이다. 이 운동에서 추구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크고 작은 대회에서 상대를 이기고 우승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내 몸을 활용해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보다 지금의 몸을 아껴 쓰고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부상 없이 기술 원리 익히며 가늘고 길게 주짓수 도장에 나오는 게 나의 목표다. 폼은 덜 나지만 그게 나한테 맞기 때문에 불만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보다 늦게 시작한 사람이 나보다 잘하는 것 같으면 원망할 대상 없는 서운함이 밀려든다. 왜 인간은 깨닫는 것도 오래 걸리는데 깨달은 것을 내면화하는 것도 오래 걸리는 걸까. 이럴 때 내가 쓰는 전략은 '된 척 하기'(Fake it until you make it)다. 모든 걸 깨닫고 성숙한 척, 진짜 괜찮은 척, 세상만사 이치를 다 통달한 척. 이렇게 인격이 훌륭한 사람인 척하다 보면, 그런 사람에 한 발짝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왜 열심히 해도 이렇게 안 느냐'라고 내가 나를 괴롭히는 자책에서 조금 자유로워진다. 그래 열심히 해도 못할 수도 있지…
할 수 있는 기술을 한 손으로 꼽을 수 있게 되는 요 때쯤부터 주짓수라는 스포츠의 맛을 조금씩 알기 시작한 것 같다. 이때부터 그랄을 한 두 개 더 받을 때까지, 도장을 향하는 발걸음이 제일 가볍고 즐거웠다. 4 그랄부터는 새로운 지옥이 펼쳐지는데,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다음은 파란띠 승단인데 1) 너무 못해서 나만 승단 안 되면 어떡하지, 2) 이 실력으로 파란띠가 되어버리면 어떡하지,라는 상반된 불안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2 그랄, 3 그랄의 세계는 대체로 핑크빛이었다. 물론 핑크빛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