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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

by corda music studio




매년 봄 벚꽃이 필 때쯤 클래식 마니아들이라면 한 번씩 예매 페이지를 들여다보곤 하는 대대적인 음악 축제가 있다. 바로 통영국제음악제가 그것인데, 전 세계의 유명 음악인들이 찾아와 수일에 걸쳐 공연을 벌이니 몸이 하나인 것이, 그리고 빈약한 지갑사정이 원망스러운 가히 국내 최대 규모의 국제음악제이다. 아름다운(나는 이 단어를 함부로 쓰지 않는다) 바다 풍경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위치에 세워진 하얀 갈매기 모양의 통영국제음악당은 온갖 종류의 연주와 공연을 위한 공간들과 더불어 주변의 관광지들과도 연계해서 그야말로 축제가 열리기에 더할 나위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인물을 기리기 위해 설립되고 형성되었다. 첼로 연주자로도 활동했던 통영 출신의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이다.



윤이상의 음악, 정중동


윤이상의 음악세계를 설명하는 단어이다. 그는 '동양의 사상과 음악 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시켜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 라는 평가를 받는다. 동갑내기로는 윤동주, 박정희 등이 있으니 시대적 배경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윤이상 = Etüde IV, Andante für Bassflöte (베이스 플룻을 위한 연습곡)


정중동, 동양철학에서는 정지는 움직임이며, 움직임은 정지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멀리서 보면 거의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음악으로 단편적 예시를 들자면, 플룻 연주자가 '도' 음 하나를 내기 직전의 작은 들숨소리, 첫 숨이 터져 나오는 순간의 작은 파열음, 공기가 울려 소리가 되기까지의 크레셴도, 호흡의 떨림, 음의 연주가 끝난 후의 울림까지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것을 '도' 음에 멈춰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나의 음악은 붓으로 그리는 그림과 같다


또, 그는 마치 수묵화의 먹물이 물기와 함께 번지는 것처럼 소리의 중심음에 다양한 연주법과 꾸밈음을 더해 번진 음향을 만들었다. 이것은 국악의 연주법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며, 곡의 소재나 제목도 한국의 것을 사용했다. 성악가 조수미보다도 반 세기 전의 동양인이 독일 유학을 가서 이런 확고한 주관을 펼쳤다는 것이 놀랍지만 당시의 유럽 작곡계는 혁신과 새로운 것을 발굴하는 데에 본격적이었고, 그의 스승 보리스 블라허(Boris Blacher)도 한국적 음악언어를 찾으라고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물론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이 서양음악인지, 아니면 동양음악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내가 써야 할 음악'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윤이상 -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1. 영상(Images)

전곡 들어보기


"한국 클래식계의 세계스타"

이 몇 단어의 조합을 보면 어쩐지 떠오르는 몇몇 얼굴들이 있다. 신문 기사, TV, 각종 SNS 콘텐츠로도 심심찮게 소식이 들려오는 소위 '클래식 스타'들이다. 이들은 뛰어난 기량으로 클래식 음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이끌어내고 자신의 음악을 더 넓은 세계에 들려주는 데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이는 곧 음악가 개인의 브랜드화로 이어져서 음악보다 그 스타성을 소비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유명세는 득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윤이상은 "정말로?" 남발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화려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로 독일로 유학 간지 불과 2년 만에 슈톡하우젠, 노노, 존 케이지 등의 작곡가들과 함께 독일의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데뷔한 것이 있다. 문제는 당시 한국에선 6.8 부정선거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빚어지고 있었고, 정부는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 공작단"이라는 공공의 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동백림 사건

'동백림 사건'으로 인해 독일과 프랑스의 교민들과 유학생 194명은 강제 서울 송환을 위해 납치되었다. 이 중에선 윤이상을 포함한 다수의 지식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당시 그의 부인은 "박정희가 남편에게 문화정책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싶어 한다는 거짓제안을 하며 여권도 없이 끌고 갔다"라고 증언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으로 시작해 최종 10년형을 받고 수감되었으며, 중앙정보부는 그가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교육을 받았다'라고 발표했다.

윤이상이 실제로 방북한 적이 있긴 하다. 당시에는 지금만큼 철저히 출입국이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고향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혹은 고구려 사신도를 감상하기 위해서가 그 목적이었다. 윤이상은 수감 중 몇 개의 곡을 작곡했고, 그중 <영상, Images>이 바로 고구려 사신도의 감상을 곡으로 쓴 것이다.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 네 악기를 위한 이 모음곡은 각각의 악기가 북쪽의 현무, 동쪽의 청룡, 남쪽의 주작, 서쪽의 백호를 담당해 표현하고 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내부가 무척 어두웠거든요. 그러나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색채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적, 백, 청, 황의 색채가 마치 이제 막 칠해 놓은 것처럼 신선했습니다. 1400년 이상 습한 지하에 보존되었던 색채는 너무도 강렬하여,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어둠 속에서 빛을 뿜는 색채, 지하의 묘실이 주는 전체적 인상은 그렇게 압도적이었습니다. 특히 나를 사로잡은 것은 선과 형의 유려한 우아함이었습니다.
-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中


중앙정보부는 윤이상에게 형을 내리며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첨교육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윤이상 - Images


하지만 이미 세계인사였던 윤이상이 예정된 중요한 공연에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자 독일 언론이 그의 납치 소식을 다루기 시작했고, 카라얀, 스트라빈스키, 리게티, 홀리거 등 영향력 있는 동료 음악가들이 윤이상의 자유를 탄원했다. 뒤이어 독일의 정부 또한 항의와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결국 2년 만에 윤이상은 독일로 귀화하며 수감생활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의 한국 입국이 불허되어 평생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죽음 11년 이후 2006년에서야 국정원 진실위에서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고 불법 연행한 것과 가혹행위를 공식 인정했지만 여전히 보수성향의 신문 사설이나 유튜브 채널 등에서는 그를 비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윤이상 평화재단이 오른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2. 첼로 협주곡(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전곡 들어보기


그 이전까지 나의 예술적 태도는 비정치적이었다. 그러나 동백림 사건 이후 박정희는 잠자는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나를 정치적으로 각성시켰다.
민족의 운명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악한(惡漢)들이 누구인지 나는 그때 여실히 목격했다.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의 음악 성격은 사회참여적으로 크게 바뀌었다. 유신체제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평화와 통일, 반핵, 환경운동을 다루는 곡들을 쓰기도 했다.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나비와 원자폭탄의 대화>, <나의 땅 나의 민족>, <광주여 영원히>, <화염 속의 천사>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중 첼로협주곡은 윤이상 자신을 표현한 곡이다. 첼로 연주자로도 활동할 정도로 첼로와 긴밀했던 윤이상은 첼로 협주곡의 솔로 첼로를 본인 자신의 상징으로, 또 오케스트라를 폭력적인 악의 무리로 표현했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협주곡과는 달리 윤이상의 첼로 협주곡에는 오케스트라의 다른 모든 첼로 연주자가 모조리 생략되고 오로지 첼로 솔리스트 한 명만이 첼로 연주자로서 무대에 오른다.


윤이상 -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이 곡에서 A음('라')은 유토피아를 상징하며, 곡의 마지막 피날레에서는 A음에 도달하기 위한 첼로의 처절한 몸부림이 계속되지만 '인간을 표현하는 악기는 A음에 이를 수 없다'는 윤이상의 시니컬한 태도로 결국 첼로를 대신해 오보에, 트럼펫이 A음을 이어받으며 곡이 끝난다.




Editor_D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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