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청소 - 재활용
이케아에서 지퍼백을 발견하고 카트에 넣었던 날이 기억난다. 사람들이 그렇게 애정 해마지않는, 이케아에 가면 꼭 사야 할 10가지? 5가지? 아이템 중에 손에 꼽히는, 바로 그것! 드디어 내 손에도 들어왔다. 사이즈별로 모양별로 하나씩 카트에 담고 신나게 돌아와 주방 서랍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주부 1단에서 주부 2단으로 훌쩍 오른 것만 같은 기분. 이케아의 지퍼백은 지퍼가 이중으로 되어 있고, 가격도 마트에서 파는 것과 비교했을 때 굉장히 저렴했기에, 쟁여놓고 사용하기 아주 좋은 아이템이다.
지퍼백은 실제로 유용했다. 파를 모양별로 크기별로 소분해 담았고, 대량으로 구매한 베이글이나 식빵을 모아두기에도 적절했다. 냉장고나 냉동실에 들어갔던 지퍼백은 그 용도가 다하면 곱게 접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보관하기도 좋았고 다 사용한 뒤 정리해 버리는 것도 쉬웠다. 음식물에 달라붙어 해동하기 어려운 위생팩과는 달리 지퍼백은 재질이 두꺼워 소분한 음식을 마구잡이로 넣어도 실온에서 해동한 뒤 몇 번 내리치면? 알아서 분리되기도 했다. 그래서 난 자발적으로 이케아에 갈 땐 물론이고, 누군가 이케아에 간다며 필요한 물건을 사다 주겠노라 말하면 지퍼백 노래를 불렀다.
지퍼백을 처음 재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소분해둔 베이글을 다 먹고 난 뒤였다. 마트에서 두 봉지에 칠천 원 정도 하는 베이글을 구매해 하나씩 비닐백에 담은 뒤 가장 큰 사이즈의 지퍼백에 한꺼번에 넣어뒀던 터. 베이글은 이미 비닐봉지에 하나씩 싸 두어서 빵가루나 기름등이 지퍼백에 묻었을 리는 없었다. 냉동실에 오래 있어서 안쪽에 성에와 같은 얼음이 좀 끼었다 뿐이지 깨끗하고 구김도 거의 없었다. 이건 좀 아까운데...? 다음에 빵을 또 소분할 일이 있으면 이걸 쓰면 되겠다 싶어 주방 구석에서 말려 서랍에 넣어두었다.
시댁에서 나의 노동력과 김장김치를 맞바꿔 온 날, 난 다시 지퍼백을 찾았다. 김치냉장고를 둘 만큼 김치를 많이 먹지 않아서 한통이나 두통 분량의 김치를 냉장고에 두고 먹는데, 그날은 시댁 김치냉장고에도 둘 수 없을 만큼 많은 김장을 했기에 자연스레 나에게 돌아오는 김치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집에 있는 밀폐용기를 하나씩 꺼내 김치를 눌러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김치가 남았다. 더 이상의 밀폐용기는 없기에, 내 선택지는 나가서 새로운 용기를 사 오든지, 지퍼백에 담든지 둘 중 하나. 남은 김치의 양이 많지 않아 다시 비닐백을 꺼내 김치를 나눠 담고 여러 번 묶은 뒤 지퍼백을 찾았다. 비닐봉지에 쌌을지언정 김치를 넣는 순간 그 지퍼백은 버리게 될 거라는 강한 예감에 새것을 꺼내기가 아까웠다. 그래 이건 재사용이니까 새것만큼 아깝지는 않겠네- 하며 신나게 김치를 담았다. 꽤 많은 양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찢어지지도 않고 튼튼하다. 재사용인데... 생각보다 괜찮네?
그다음부턴 집에서 사용 후 나온 지퍼백을 씻어 말리기 시작했다. 다진 파나 마늘을 담았던 작은 사이즈 지퍼백도, 여행 갈 때 강아지 사료를 담았던 지퍼백도 씻어 말린다. 이걸 어떻게 재사용할지, 사용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우선 씻어두면 어떻게든 사용할 방법이 찾아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지퍼백을 모아 두자 이상하게 쓰임이 생겼다. 사료를 담았던 지퍼백은 다음번에도 사료를 담게 되었다. 지퍼백의 색과 모양을 기억하니 자연스레 손이 갔다. 대량으로 구입한 원두를 먹을 만큼만 소분해 원두 용기에 넣고 남은 원두는 꽁꽁 싸 지퍼백에 넣었다. 또 구워 먹고 남은 삼겹살이나 목살도 끈끈이 랩으로 한 덩이씩 감싼 뒤 지퍼백에 담아 냉동실로 보냈다. 대부분 지퍼백에 뭔가를 바로 넣기보다는 낱포장을 한 뒤 밀폐해 구분해 넣는 용도가 많았다. 내가 지퍼백을 사용하는 방식은 주로 이렇구나. 형태와 크기가 정해져 있는 용기보다 내 마음대로 아무거나 양껏 넣을 수 있는 지퍼백이 내가 선호하는 정리방식임을 새삼 깨달았다.
지퍼백을 재사용하기 시작하자 새 지퍼백을 꺼내는 일이 부담스러워졌다. 이 지퍼백도 모두 플라스틱이고 깨끗하게 닦아 쓰레기로 분리수거한다고 한들 사용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또 분리수거해서 새로운 제품으로 다시 만들어진다고 해도 내가 사용할 만큼 하고 분리수거해 버리는 것과 한번 사용하고 생각 없이 버리는 것에는 그 양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지퍼백 재사용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지자 자연스레 지퍼백에 메모를 시작한다. 이건 강아지 사료를 주로 넣었고, 이건 밖에서 잘 때 칫솔을 넣었던 용도이고- 이렇게 저렇게 용도를 구분해 놓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닳고 닳은 지퍼백이라도 찢어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걸 지금껏 난 왜 곧장 버렸을까.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너무 쉽다. 따로 종량제 봉투를 사야 하는 것도 아니고 구분해 날짜에 맞춰 내놓으면 수거해 가는 이 나라의 시스템이 미치게 편하긴 하지만, 과연 이게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이 자꾸 고개를 쳐든다. 다 수거해서 재활용하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싶은데, 지구와 환경에 대한 책과 영상을 접할 때마다 마음속 부채감이 조금씩 쌓인다. 지퍼백 그거 얼마나 한다고 뭘 굳이 씻어 쓰고 다시써? 너도 참 궁상이다,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디선가 나와 같이 궁상을 떨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지구온도가 올라가는 속도가 0.0000001초라도 늦춰진다고 생각하면 기꺼이 함께하겠다. 그 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