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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n 02. 2023

순례길 열 번째 이야기

평균의 함정

구간 : 로그로뇨 - 나헤라
거리 : 29.6KM
소요 시간 : 6시간


  스마트폰의 발달은 순례길을 걷는 방식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두꺼운 책으로 들고 다녀야 했던 순례길 지도나 마을에 대한 정보들을 작은 스마트폰 하나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여전히 책을 들고 다니는 순례자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짐의 무게를 어떻게 줄일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보면 스마트폰의 발전은 순례자들에게 엄청난 축복이다. 'Buen Camino', 'Camino Ninja', 'Camino Tool' 등, 많은 어플들이 각자의 장점으로 순례자들을 돕고 있다.


  내가 사용했던 'Camino Ninja'는 사람들이 많이 거쳐가는 대도시를 기준으로 하여 표준적인 일정을 제시한다. 특히, 이 애플리케이션의 장점은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고도에 따른 높낮이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높은 산을 넘는다거나 급격한 내리막을 걸어야 할 때는 비교적 적은 거리를 설정해 주고, 평지와 같이 오래 걸어가도 피로가 덜 한 구간은 비교적 긴 거리를 제시한다. 이 애플리케이션에 따르면 생장에서 출발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총 34일이 걸린다. 보통의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표준으로 루트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도착해서 보니 사라진 까미노 닌자

  까미노를 직접 걷기 전, 순례길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는 '평균적으로'라는 함정에 빠졌다. '평균적으로', '한국'에서 '군대'를 다녀온 '20대 남성'들은 29~30일 정도 소요된다는 말에 그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작은 마을을 거점으로 삼을 때가 많았고, 오히려 붐비는 것보다는 좋다며 그것을 따르기로 했다. 


  물론 이전의 루트 역시 몇 번의 수정을 거쳤지만, 오늘 걸었던 로그로뇨에서 나헤라까지 가는 구간은 지금껏 내가 걸었던 구간 중 가장 거리가 길었다. 총거리는 29.6KM. 지금까지 가장 길었던 구간은 첫날 넘었던 피레네 산맥 구간이었기 때문에 애플리케이션에 나와있는 거리를 보고 겁부터 먹었다. 오늘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걸어야 할까. 그런데 웬걸. 오늘 걸었던 시간은 6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중간에 바에서 쉬면서 음료를 마시고 빵을 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6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거의 30KM를 주파한 것이었다.


  이 구간에 급격한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없던 것이 빨리 갈 수 있던 주된 요인이었다. 이전까지는 1시간에 3KM를 기준으로 생각했었는데, 별 다른 변수가 없다면 1KM를 가는데 10분에서 11분 정도 소요됐다. 일주일 가까이 걷다 보니 체력이 붙고, 걷는데 익숙해진 덕이었다. 이런 식으로 걷기에 집중해서 시간을 단축시키니 다음부터 걷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까미노 닌자 애플리케이션이 나에게 제시한 29.6Km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평균'의 함정에 빠졌던 나는 내가 몇몇 단어들에 속한다는 이유로 개인적인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20대보다 30대에 가까웠고, 제대한 뒤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획한 루트는 나에게 맞지 않았다. '평균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였을 뿐, 실제 그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데이터를 수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평균'의 함정에 빠져 나를 채근할 필요가 없었다. 

도착해서 마시는 맥주!


  오히려 나는 '평균'보다는 '표준'을 제시하고 싶다. 내가 가는 이 길은 나보다 앞서 수 백만, 수 천만 명이 걸었던 길이다. 그들은 각자의 속도로 걸어갔지만, 그들이 걸으며 느꼈던 가장 순조로운 방법, 가장 안전한 방법, 가장 적당한 방법이 그들의 뒤에 걷는 순례자들에게 표준으로 전해진다. 표준을 따라 이 길을 걷는 것에 익숙해졌을 때, 나는 다시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았고, 나에게 맞는 걷기 방법을 느꼈다.


  일단 따라 걷자. 걷다 보면 나만의 걸음이 보인다.


(까미노 닌자 애플리케이션은 개발자께서 돌아가신 이후 삭제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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