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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n 05. 2023

순례길 열한 번째 이야기

뜻밖의 여정

구간 : 나헤라 - 산토도밍고 데 라 깔사다
거리 : 20.9KM
소요 시간 : 5시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가장 집중해야 하는 시간 중 하나가 큰 도시에서 빠져나올 때이다. 규모가 작은 도시에서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면 순례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조개 모양 표식이나 화살표, 혹은 이정표가 나오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대도시에서 머물다가 출발할 경우, 숙소 위치에 따라 안내 표시를 찾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경우에는 도시로 들어왔던 길을 떠올려서 찾아가는 방법과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방법, 혹은 구글 지도 검색을 통해 도시를 빠져나가는 방법 등이 있다. 물론 아침에 배낭을 메고 길을 두리번거리다 보면 많은 주민들이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곤 한다.


  아무리 스마트폰 어플로 길을 찾으려 해도 감이 전혀 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역시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문제는 여름과 같이 날씨 때문에 이른 시간 출발할 때 발생한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고 나서 며칠 동안 최고 기온이 40도를 웃돌았다. 하루 종일 길을 걷고 나면 몸에서 열이 나고, 몸살이 난 듯 기운이 없고 몸이 아팠다. 아마 하루 종일 받았던 열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해 생긴 증상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해가 떠 있지 않을 때 걷고, 최고 기온에 다다르기 전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나는 최소 5시에 일어나서 5~6시 사이에는 출발을 했다. 물론 그전에 출발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이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는 마을 주민들은 드물었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이 다른 날보다 짧았기 때문에 조금 늦게 출발했다. 천천히 일어나 아침을 먹고 나서 출발하니 6시 20분이었다. 내가 숙박을 한 곳은 도심과 조금 떨어져 있었다. 나는 다른 대도시를 빠져나갈 때처럼 구글 지도를 켜고 다음 도시로 갈 길을 확인했다. 구글에서는 나에게 두 가지 길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거의 직선으로 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은 마을들을 돌아서 가는 길이었다. 두 길의 소요 시간은 약 1시간 정도 차이가 났기 때문에 나는 직선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순례길 표시가 보이지 않아 불안했지만, 아직 해는 뜨지 않아 하루를 시작하는 주민들이 없었기에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웬걸. 그 길은 자동차 전용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었다. 다른 순례길처럼 차도 옆에 인도가 있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차와 같이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20분을 걸었다. '이대로 위험하게 계속 걸어야 할까, 늦었지만 다시 도시로 돌아갈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몇 번을 생각해도 다시 돌아가서 길을 제대로 찾는 것이 정답이었지만, 한 걸음이라도 적게 걷고 싶은 욕심은 정상적인 판단을 방해했다. 그렇게 차도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작은 마을에서 나오던 자동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운전석 창문이 열렸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몇 마디를 내게 건네고는 손으로 자신이 나온 길을 가리켰다. 누가 봐도 이쪽 길로 쭉 가라는 말이었다.


"무차 그라시아스!!"


  그렇게 안내받은 길을 통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게 길을 알려준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계속 걸어가도 나오지 않는 순례길 표시 때문에 불안했다. 몇몇 공장을 지나고, 밀밭을 지나고, 벌써 밭에 나와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드디어 순례길 표시를 발견했다. 내가 지나온 길과 내 앞에 펼쳐진 길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지만, 나를 이끌어주는 표시를 발견했을 때 드는 안도감이란! 그렇게 화살표를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다른 순례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잃었을 때 불안해서 걸었던 속도는 1KM에 9분 30초, 사람들을 만나서 걸었던 속도는 1KM에 11분. 마음 가짐에 따라 발걸음도 달라졌다.

아마 내가 걸었던 길로 걸어온 순례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더위를 피하려는 속셈과 계획적이지 못한 순례자, 그리고 친절한 마을 주민이 만들어낸 뜻밖의 여정은 나의 순례 여정에 새콤한 향 하나를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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