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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Sep 03. 2023

순례길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초등학교 1학년 순례자

구간 : 빌레이 - 벤다스 데 나론
거리 : 32.8KM
소요 시간 : 9시간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사리아부터는 순례자들이 많아지는데, 이 경우에 원하는 마을에서 쉬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문제가 발생한단. 큰 관광도시 몇 개를 제외하면 이 많은 순례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음식점이나 바가 없었다. 알베르게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마을들의 알베르게는 인터넷으로 예약을 할 수 없으므로, 전화를 걸어 하나하나 물어보거나 다른 순례자들보다 먼저 도착해서 방을 잡아야 했다. 굳이 사리아에서 멈추지 않고 마을 하나를 더 지나온 이유였다. 특히 이 기간에 유럽 전역에서 1만 2천 명이 넘는 청년들이 몰려온다는 기사까지 있었기 때문에 쉴 곳과 지나칠 곳을 계산하며 걸어야 했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한국인이 함께 출발했다. 한 명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20대 중반의 한국인 남성이었고, 다른 두 명은 순례길 초반부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이모와 조카였다. 특히 이모를 따라온 8살, 초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는 순례길 어느 곳을 가든 화제였다. 자신의 의지로 걸으려는 성인들, 심지어 건장한 성인 남성들도 힘들어하는 순례자의 길에 어른의 허리께도 오지 않는 어린아이가 걷고 있다니. 심지어 이 길의 시작점인 생장 드 피에드포트부터 걷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백이면 백 모두 놀라워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어린아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대부분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인데, 이들은 대부분 부모님의 휴가, 혹은 방학을 이용하여 짧은 거리를 걷는 중이거나 그마저도 자전거, 혹은 부모님의 자전거 뒤에 딸린 짐칸에 앉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자신의 짐을 메고 혼자 끝끝내 걸어가는 한국인 초등학생에 대한 관심은 여름날의 햇볕보다도 뜨거웠다. 어떤 사람들은 이 어린 순례자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기도 했다. 어른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함께 추억이라도 남기고 싶어 할 때면 이 친구는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는 듯 가만히 웃음을 짓고,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사진을 함께 찍어줬다. 그리고 짧은 영어로 그들의 관심에 화답해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어린 순례자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시간을 보낼 때는 대부분 음식점에서 식사 중이거나,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당연히 이 친구의 평온한 모습과 안정적인 모습만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만 7세'의 '한국에서 온' '초등학생'이 '스스로 선택'하여 걷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말대로 신문에 실릴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었던 주변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길을 걷는 아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역시 8살은 8살이었다.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잠투정이 심했고, 처음 겪는 상황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잠에서 깨면 항상 누군가를 찾았으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떼를 썼다. 우리가 8살 아이에게 기대하는 모습, 그 이상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자라왔고 무서워하는 어른이 없다고 했다. 똑똑한 이 아이는 예쁨 받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어쩌면 그보다도 사람을 힘들게 하는 방법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단한'이라는 수식어가 점차 이모에게로 옮겨졌다. 자기 동생의 아들을 데려왔으니 아이를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모는 아이의 직접적인 양육자가 아니었고 그녀 역시 어린 나이였으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힘든 길을 걷는 순례자였기 때문이다. 아이의 짐은 많은 부분 이모가 담당했고, 혼자가 아니었으므로 다음 날의 모든 계획을 세워 철저하게 그것에 맞추어야 했다. 혼자 걷는 순례자가 하는 것보다 몇 배의 걱정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외국 여행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조카와 함께 걷는 한 달간의 순례길이 그녀에게 어떤 경험이었는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오늘에서야 절정에 다다랐다. 이른 아침부터 조카는 칭얼대며 울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것은 어른들에게도 힘들기 때문에 조카의 행동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주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조카는 시간이 지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사리아에서부터 늘어난 더 많은 순례자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관심이 울고 있는 조카에게 집중되자 이모는 더 빨리 조카의 울음을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척 심각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럴수록 조카의 울음은 더 커졌고 이모는 점점 당황하기 시작했다. 달래면서 걷고, 다시 멈춰서 울면 다시 달래고, 또 걷는 것을 두어 시간 동안 반복했다. 우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자 조카는 급기야 악을 쓰며 울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도화선이 되어 그동안 이모가 가지고 있던 조카에 대한 분노와 그보다 더 큰 자신에 대한 혐오를 폭발시켰다.


  이모는 코피를 쏟기 시작했다. 몇 주 동안 쌓인 스트레스의 분출은 고작 코피가 끝이었다. 여전히 이모는 아이의 양육자가 아니었고, 조카에 대한 분노를 온전히 내비칠 수 없었다. 스트레스의 원인과 그를 폭발시킨 도화선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은 없었다. 폭탄은 그녀의 내부에서 터졌고, 내부는 그 충격을 온전히 다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울음보다 코피가 먼저 나오는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르토마린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라면, 햇반, 김치
포르토마린으로 가는 다리


  결국 몇 시간을 보내다 해가 떠올랐다. 이모를 위해 우리는 잠시 조카를 데리고 따로 걸었다. 이런 방식으로나마 우리는 이모에게 몇 시간의 자유를 선물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이모는 조카와 다시 싸울 힘을 회복했다. 조카 역시 이모에 대한 짜증과 서운함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 두 사람은 나와 같은 날짜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다. 물론 두 사람의 싸움은 마지막날까지 끝나지 않았다.


아침의 사건 덕분에 해가 쨍쨍할 때도 걷게 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서도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조카에게 쏠렸다. 이모가 가지고 있던 조카의 크레덴시알을 보며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정말 생장에서부터 시작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눈으로 확인했다. 조카는 당당히 이모와 함께 완주증을 받았고 순례길을 완주한 한 명의 순례자로 인정받았다.


  초등학교 1학년의 순례자. 부모님과 떨어져 이모와 같이 한 달을 걸었던 어린아이. 그에게 붙게 될 수식어는 셀 수 없을 것이었다. 조카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길 바라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순례의 여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위대한 이모의 노력 역시 함께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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