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별 Sep 01. 2023

순례길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불을 밝히는 이유

구간 : 트리야카스텔라 - 빌레이.
거리 : 29.4KM
소요 시간 : 8시간 30분


  누군가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한다고 이야기하면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여정을 떠나기 전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까미노를 다녀온 지인이 없는 경우, 한국에는 순례자들이 구성한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거기에 들어가 보면 전체 루트 중 내 일정에 맞게 짤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순례길에 가져가야 할 준비물 목록들을 올려주기도 한다. 특히 순례길이 처음이라면 한국에서 챙겨가야 할 것들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초행자들은 인터넷을 참고해서 하나 둘 준비물을 배낭에 챙긴다. 그렇지만 이 '준비물'이라는 것이 커뮤니티 내에서 많은 경우 논쟁의 대상이 된다. 기본적으로 짐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이견이 없으나 필수적으로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물품들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준비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이든 '굳이 필요 없다'라고 생각할 것이고, '굳이 챙겨가서 사용했던' 사람들에게는 같은 물건도 굉장히 유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헤드랜턴이었다. 헤드랜턴을 챙겨가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은 안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대부분 하루의 일정을 해가 뜨기 전에 시작하기 때문에 험한 길을 밝혀 줄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날의 루트가 도로나 산길이라면 헤트랜턴의 필요성은 더욱 대두된다. 그렇지만 헤드랜턴 챙겨가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대체할 수단이 있는데 굳이 짐을 하나 더 챙길 필요가 있냐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는 스마트폰의 플래시가 헤드랜턴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어둠 속에 함께 적응해서 길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이유이다.



  나는 헤드랜턴을 챙기려 하지 않았으나, 기어코 가져가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어쩔 수 없이 짐에 포함시켰다. 무게도 많이 나가지 않는 것으로 선택해서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의 타협이었다. 그리고 이 헤드랜턴은 내가 다음 순례자에게 추천해 줄 가장 중요한 물건 중 하나가 되었다. 비록 그것을 활용한 횟수는 다섯 번이 채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내가 가보지 않은 어두운 길을 밝혀줬던 헤드랜턴의 역할이 무척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해가 뜨고 나서 여유롭게 출발하는 순례자에게는 필요 없겠지만, 나처럼 누구보다 빨리 출발하고, 빨리 걸었던 경우에는 헤드랜턴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다.



  트리야카스텔라에서 출발하는 오늘의 여정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두 길은 약 8KM 정도 차이가 났다. 내가 주로 참고하던 까미노 닌자 어플에서는 8KM를 더 가야 하는 길을 소개했다. 두 갈래길에 서서 고민하다가 8KM가 짧은 루트에는 그만한 위험과 역경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까미노 닌자 어플의 추천을 선택했다. 그렇게 화살표를 따라 길을 나섰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포장도로가 나왔다. 왕복 4차선이 넘는 도로였지만 지나가는 차는 볼 수 없었다. 이른 시간에 출발했기 때문에 길을 걷는 순례자도 없었다. 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점차 산속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고, 마을에서 전해지던 불빛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가로등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산속에서 가로등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빛이 사라졌다. 산속은 물론, 도로에도 가로등은 없었다. 급하게 헤드랜턴을 꺼내 길을 밝혔다. 어둠이 주는 공포는 사라졌으나, 산속에 혼자 남았다는 두려움은 해소되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에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한 줄기 빛에 의지하여 수십 분을 걸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여 그 빛에 더 가까워지고자 했다. 빛에 점점 가까워졌고 점차 선명하게 빛을 둘러싼 주변이 보였다. 스마트폰의 플래시로 길을 밝혀서 걷고 있던 순례자였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했고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역시 나처럼 무서운 마음으로 작은 불빛에 의존하여 천천히 길을 걷고 있었다. 이제 우리를 둘러싸던 '혼자'라는 공포는 사라졌다. 우리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그렇게 또 다른 불빛을 만났다. 몇 개의 불빛이 더 합류했다. 함께 걸어가다 보니 우거진 숲을 지나게 되었고, 떠오르는 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사리아(Sarria)에 도착했다. 순례길의 마지막 구간이었다. 도보 순례자는 목적지까지 최소 100KM를 걸어야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100KM의 요건을 충족하는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인 사리아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여정을 시작한다. 이 도시에 접어들면서 순례자들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꼬질꼬질한 우리보다 훨씬 깔끔한 복장을 한 순례자들이 등장하고, 훨씬 가벼운 짐을 가지고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금까지 600KM를 넘게 걸으면서 혼자의 힘만으로 이 길을 감당한 시간은 거의 없었다. 낯설고 두려운 길에서 항상 누군가를 의지하며 걸었고, 항상 누군가에게 기댈 곁을 내어주며 걸었다. 조금의 빛도 없는 길을 걸을 때면 나는 빛을 밝혔다. 그럼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은 어둠이 주는 공포보다 완벽하게 혼자인 사실, 어떤 일이 생겨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누군가가 밝힌 빛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무서움이 사라졌다.


  나는 나만을 위해 빛을 낸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빛은 내 앞의 짧은 거리만을 밝혀줄 뿐, 내가 걷는 길의 양 옆과 뒤는 밝혀주지 못했다. 완연한 어둠을 일시적으로 몰아내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어둠, 그러니까 깜깜한 길을 걸으면서 우리가 가지는 어두운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빛을 통해 사라지는 것이었다. 내 앞을 밝히는 빛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가 저 멀리서 빛을 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둠을 이길 수 있었다. 서로를 연결시키는 빛은 어둠이 이 길을 완전히 잠식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어둠을 짊어지고 있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는 언어로 빛은 빛나고 있었다.

이전 10화 순례길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