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봄. 조카가 태어났다.
조리원에서 돌아온 조카를 처음 보러 가던 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갓난아기를 다시 안아보는 좀 큰 아이 엄마들의 심정을 많이 보고 들었다. 지나가버린 나와 내 아기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고 했다. 그땐 몰랐던 소중함과 애틋함, 미안함까지도. 심하면 눈물과 함께.
실제로 본 조카는 경이로울 만큼 사랑스러웠다. 보드라운 아기를 두 팔에 안은 순간, 정말로 밀려왔다. 내 아기가 요만했던 시절이. 동시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와. 다행이야! 싹 다 지나가서!!!!!’
건강하고 자유의지가 있는 성인이 하루아침에 잠깐의 외출도 백만 가지의 제약을 받으면서 <먹는 것, 입는 것, 씻는 것, 싸는 것 등 생존에 필요한 모든 활동을 나에게 100% 의지하지만 의사소통은 1도 되지 않는 존재>와 매일 단둘이 24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은 상상 이상의 삶의 변화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삶을 전부 잃어버리는 일이다. 이를 의연하거나 덜 힘들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이유는 여럿 있다. 기저귀를 제 때 가는 걸로 채울 수 없었던 타고난 성취욕과 인정 욕구. 매 순간이 돌발상황인 육아와 상극인 계획 강박. 하루에 일정 시간은 반드시 혼자 놀아야 하는 타인 민감성. 고위험 산모실에서 두 달 입원을 견디고 만삭에 무사히 출산한 바로 다음 날 아기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덕에 얻은 산후우울증. 광고회사에서 클라이언트를 스터디하던 검색 능력으로 모은 아기 심장질환에 대한 각종 정보와 그로 인해 자가 증식한 스트레스.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회사. 그에 따른 진로 고민. 더불어 닥쳤던 우리 고양이의 림프종. 일 년간 이어진 간병과 이별. 그리고…그리고… 내 아기는 더없이 귀여웠지만 시계는 돌아볼 때마다 멈춘 듯했고, 생각이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겐 괴롭고, 외로운 시절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빛이 보이지 않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세대는 SNS의 시대에 엄마가 되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내 고생담을 토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나 역시 그 시절엔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공유하곤 했지만… 이제는 안다. 사람들은 저마다 힘듦을 안고 있어서, 제 피드에서까지 남의 힘듦을 절실히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 겪어보지 못한 서로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부러진 남의 팔보다 종이에 베인 내 손가락이 더 아픈 게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어디든 살짝이라도 아파본 사람은 지금 앓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다. 처진 가방을 메고 걸어본 사람은 다른 어깨 위에 올려진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아이 둘이 제 발로 집 밖에 뛰쳐나갈 정도로 자란 지금의 나도, 그 사이에 여러 상실과 현타를 겪으며 나이를 먹은 나도 그래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힘듦을 현재형으로 겪는 사람들에게 하트를 누르고, 메시지를 남기고, 생각날 때마다 안부를 묻는다. 그때의 나에게 다정한 이들이 그랬듯이.
끝내 외로울 거라면 해가 갈수록 조금 더 나은, 누군가를 덜 외롭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게 그립지 않은 모든 시간들은 그렇게 의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