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은안 해도미워는 말아줘
나는 선생이다. 대학에서 수업을 하기도 하지만, 입시생들과 음악영재를 가르치는 바이올린 선생이다. 혹자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혹자는 나를 교수님, 혹은 스승님이라고도 한다. 벌써 2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내가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한때는 주말이면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김밥을 먹어가며 레슨을 하며 한 해에 10명 넘게 대학에 넣는 일도 있었으니, 무지 많은 학생들을 가르친 것만은 사실이다. 그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아직도 나랑 연락이 닿아 가끔 얼굴을 보는 학생들-그들도 이미 30대 후반이지만-도 있고 또 궁금하기는 한데 소식을 알 수 없는 학생들이 있기도 하다. 그래도 결혼을 하면 알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연락하는 학생들이 가끔 있어 내가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나의 남편도 선생이었다. 스물다섯부터 테니스를 가르치기 시작해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국내외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워낙 테니스로는 제일 유명한 학교에서 가르쳤던 만큼, 그의 학생들 중에는 아주 유명한 학생들도 많았고, 그의 동료들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열두살 때부터 조기 유학을 80년대에 홀로 떠나 그런지, 남편은 누구와 연락하고 지내고 하는 것을 잘 못하던 사람이다. 어쩌면, 그는 겉모습은 동양인이지만 속의 생각과 행동은 서양인의 정서를 가진 바나나 같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미국에 살며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았을지도 모르는 남편은,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딸과 나의 고집 때문에 한국에서 한 10년 정도 훈장질을 했었다.
나도 안다. 무엇이든지 가르치려면, 모질어야 한다는 것을. 처음 남편이 서울에 돌아와 포항의 서의호 테니스 아카데미를 맡으며 가장 먼저 한 일은 8층 숙소까지 걸어 올라가기였다. 훈장님이 걸으시니 학생들도 따라 걸으며 얼마나 원망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좋게 말하자면, 매사에 정확하고 빈틈이 없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진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지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선생의 모든 면모는 성적으로 말한다. 남편의 학생들은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서울로 스카우트돼서 올라온 후 그는 대한민국 테니스의 역사를 새로 쓰는 일에 일조를 했다. 어느 순간, 그는 유명세를 탔지만, 그렇다고 그의 지독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최고를 찍었다고 생각하던 선수들을 이전과 똑같이 훈련시키고 닦달을 하며 갈등이 빚어지고, 결국 그는 이 나라를 떠나 중국으로 가서 이번에는 중국 테니스의 역사를 다시 한번 바꾸어 주었다.
남편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조금은 지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를 "돌아온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반겨주는 분들도 계셨지만, 경계하고 텃세를 부리는 분들도 많았다. 나는 그냥 남편이 우리 조카들이랑 그 친구들이나 가르치며 여행이나 함께 다니는 생활을 원했지만, 그는 그것으로는 답답했었던 모양이다. 심장암을 발견하기 직전, 그는 서울 생활을 접고 미국의 유수 아카데미의 헤드코치로 영입될 예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서울에서 그의 인생을 마감해야 했다.
누구나 떠나가면 아쉽듯이, 그동안 연락이 끊겼던 많은 분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해 주었다. 한 때 그의 사부님이셨던 테니스의 구루 닉 볼레테리를 비롯, 이름만으로도 브랜드가 되는 국내외의 많은 분들이 이메일로, 페이스북으로, 그의 전화로 그의 떠난 자리를 아쉬워해 주었다. 하루밖에 빈소를 차릴 수 없었기에, 시간이 맞지 않으신 분들은 화환으로, 부고 기사로 그의 넋을 위로해 주었다. 기억에 남을 만큼 훌륭한 인품을 지니지는 않았어도, 테니스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그를 기억해 주시는 모든 분들이 감사했다. 심지어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내 남동생을 만나 부의금을 전해주시고 묘소까지 찾아주신 서의호 아주대 학장님은 나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너무 경황없이 보내서 누가 빈소에 다녀갔는지 기억도 못하지만, 그래도 꼭 왔어야 할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은 아직도 섭섭하다. 물론, 남편 생전에 마음이 좀 맞지 않고 서로 관계가 틀어졌어도, 자신이 그 자리에 가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준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연락 한 번 없는 그의 옛 제자들을 생각하면, 남편이 테니스는 잘 가르쳤을지 몰라도 인생은 못 가르치고 간 것 같아 씁쓸하다. 물론, 당시에 서울에 없었을 수도 있고, 소식을 못 들었을지는 몰라도 남편의 친구가 특정 지어 연락까지 했다는데 연락 한번 하지 않고 서울 돌아와 온갖 예능에 출연하며 자신의 자리를 즐기는 것을 보면 누가 끌어준 건데 하며 괘씸하기까지도 하다. 하지만 어찌하나... 남편은 갔고 그는 남았으니 결국 오래 사는 사람이 승자인 듯하다.
나는 더 이상 선생은 안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긴 하지만, 나는 그들의 선생이 아닌 훈장이, 스승이 되고 싶다. 물가는 하늘로 치솟고 집값은 하늘 끝이 어딘지 모르고 달려가는 요즘, 나는 그래도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만큼은 바이올린 실력만이 아니라 인생을 옳고 바른 길로 가이드해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떠난 후에는 나의 재주만이 아닌 내가 비추어 주던 작은 빛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