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원래 불공평하고, 내 선택의 결과는 내가 지고 가야 할 뿐이다.
졸업을 하고 나서, 한동안 우울했었다.
나는 억울했다.
회사에는 시험도 보지 않고 논문도 쓰지 않는 직장인 전용 석사 과정을 졸업해서 나보다 빨리 석사를 딴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아, 힘들어, 이번에 졸업한다고 발표해야 해서 수십 장짜리 PPT를 만들었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나는 울컥 화가 났다.
‘아니, 나는 매 수업마다 발표 두 번씩 해 왔는데 쟤는 졸업한다고 수십 장짜리 ppt 한 번 만드는 거야? 그런데 왜 쟤도 석사고 나도 석사야? 나는 더 인정받아야 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도 나도 같은 석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친한 회사 선배와 밥을 먹다가, 힘든 내 마음을, 내 어두운 감정을 말했다. 그러니까 그 선배는 “야, 너 대학원 가라고 등 떠민 사람 아무도 없어. 너가 선택한 거잖아? 그리고 이제 멋지게 졸업했잖아. 그럼 속시원해야지~! 넌 지금 모두에게서 위로받고 싶은 거야.”라고 말했다.
너무 정확하게 정곡을 찌른 그 말에 나는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맞다, 나는 위로받고 싶었다. 너무 정확한 말, 너무나 맞는 말.
그런데 그 때의 나는 ‘그럼 위로해주면 안 되나? 사람들이 나는 위로해주고 동정해주길 바라는 게 잘못인가?’라고 생각했다. 그 때의 나는 세상 억울했다. 모든 게 억울했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나를 위로해줘야 할 의무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당연히 그 선배에게도 없다. 졸업장을 따 낸 나를 축하해주려고 했던 그 선배에게, 나를 걱정해주고 안쓰러워해 주지 않는다고 내가 섭섭해 할 이유도 없다.
머리로는 아는데, 그 때의 나는 모두에게서 위로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친한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야,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그러면 너도 다니기만 하는 석사과정 가지 그랬어? 그런데 너는 거기 안 갈 거잖아. 결국 자기만족이야. 그 자기만족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돼.”라고 팩폭을 날리는 것이다.
이 말도 참 섭섭했는데, 한 일 년이 지나고 소진되었던 마음이 다시 차오르고 나서 다시 곱씹어보면 참 맞는 말이다 싶다.
그러네, 내가 왜 사서 고생을 하고서 남한테 징징거렸을까.
그리고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했으니 내 고생을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줘야 해.’
‘내 고생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에 나온 사람들의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와서 자유를 찾았는데, 왜 불행했을까? 그들은 자신이 죽음의 고난을 겪고 살아 나왔기에 더 특별한 삶,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를 원했지만 실제로 그런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용소 밖에서 전쟁을 겪어낸 사람들도 나름대로 힘들게 전쟁을 겪어냈으니까.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과 찬탄을 기대했던 수용소 생존자들은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불행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살면서 아프기도 하고, 사고를 겪기도 하고, 나처럼 스스로 지옥문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양한 고생을 한다. 그렇지만 그 고생 자체에 남과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내 고생을 알아주고 위로해주고 우쭈쭈해줄 의무는 전혀 없다. 사실은 피할 수 있으면 고생을 안 하면 제일 좋고.
고생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삶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걸 잊지 말자.
세상 억울해봤자, 나한테 도움 되는 건 없다.
고생길을 가고 있는 모든 직장인 대학원생들, 파이팅입니다!
언젠가는 졸업이라는 끝이 있어요. 비교하지 마시고 내 졸업만 신경쓰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