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인이라는 소수자의 정체성
오랜만에 회식을 하게 되었다. 우리 부서 인원이 많아서 두 그룹으로 나눠서 각각 식사하게 되었는데, 내가 속한 그룹은 파스타집에서, 다른 그룹은 고깃집에서 식사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팀장님은 내게 생색을 내며 말했다. “내가 너 생각해서 일부러 파스타집으로 예약했어.” 나는 당연히 “감사합니다. 딱 보고 생각해 주신 건 줄 알았어요.”라고 대답했다.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고 배려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하루가 지난 지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주류인 사람들(다수)는 소수에게 ‘배려해주는’ 포지션이고,
소수인 사람들은 그에 '감사하는' 포지션일까?
왜 소수자는 항상 다수의 눈치를 보며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건 인정받지 못할까?
사람은 누구나 소수자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채식인이라는 것은 나의 소수자적 정체성 중 하나인데, 비채식인(다수)들은 소수자인 채식인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고를 때 특별히 ‘배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배려는 감사받는 게 마땅한 행동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 당연히 생각도 안 해 봤을 거다.
그렇지만 이게 맞는 걸까? 왜 당연한 걸까?
나는 늘 비채식인들의 눈치를 살피고, 고깃집 회식에 따라가서 고기 냄새를 맡으면서 웃고 있었다. 그건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는, 내 나름의 배려였다. 그렇지만 ‘네가 고깃집 와서 고기를 안 먹으니까 불편해’라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너는 고기도 안 먹는데 우리를 배려해주느라 여기 왔구나. 고마워’라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못 들어 봤다. 사실 그런 말을 할 거라는 상상도 해 본 적 없다. 나의 식사는 늘 그들의 기분보다 후순위였다.
그렇지만, 이상적으로는 다수든 소수든 모두가 같이 즐거울 수 있는 식탁을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특별한 ‘배려’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소수자가 다수자에게 감사를 표할 일이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만약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식당으로 가는 게 당연한 거에요.’라고 대꾸를 한다면? 맙소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마 난 평생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을 거 같다. 나는 다수인 비채식인들의 눈치를 보고 전전긍긍하는 습관이 평생 배어 있다.
요즘은 너나할 것 없이 다이어트를 하는지라, 점심시간마다 탕비실에서 닭가슴살을 데워 먹는 사람이 많다. 나는 고기 냄새를 싫어해서 점심시간마다 탕비실에서 심한 고기 냄새를 맡는 것은 참 고역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들에게 ‘냄새나는 건 돌리지 말라’고 할 수 있는 권리는 당연히 없다. 내가 그들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자기가 무슨 음식을 싸왔든지 간에 공용 전자렌지에 돌릴 수 있는 권리가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역으로 고기가 냄새가 나지 않고, 채식 음식이 냄새가 많이 났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다수인 비채식인들이 채식인을 ‘배려’해서 냄새를 ‘참아주는’ 게 되지 않았을까?
다른 예로, 외국에서 점심시간에 공용 전자렌지에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데운다면 어떨까? 예 전에는 유럽의 공용 주택에서 이민자들이 냄새가 강한 자기 나라 음식을 조리할 때 냄새 때문에 민원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는, 음식의 냄새가 얼마나 강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냄새를 만드는 사람이 다수자이냐 소수자이냐에 따라 민원이 생기고 안 생기고 달라진다.
사회의 주류로 산다는 것은 참 안전하고 편한 삶이다. 그들은 자신의 불편함에 대해 소리 높여 말할 필요도 없다. 사회에 소수, 비주류가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비주류를 맞닥뜨렸을 때 얼마든지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해도 비난받지 않는다. 그들이 비주류를 생각해서 하는 행동은 ‘배려’가 되고, ‘존중’이 된다. 그러나 비주류가 주류를 생각해서 하는 행동은 ‘배려’도 ‘존중’도 아니다. 배려와 존중은 권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