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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Sep 20. 2019

그래, 태권도로구나.


불면이 일상이던 시기가 있었다.


저녁엔 물에 적신 담요처럼 늘어졌다.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그리 피곤한데도 누우면 그때부터 머릿속은 말개졌다.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지금부터 생각해보란 듯.


정미경의 <아프리카의 별>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말인데, 그 시절의 내가 딱 저랬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눈이 점점 더 말똥해지면서 절대 잠이 오지 않는 날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책에서 말하는 '정말 중요한 무언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생각하기 싫어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밤이면 나는 웹툰을 봤다. 멍한 표정으로 포털에 정식으로 연재되는 웹툰부터 베스트 도전 만화까지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마음에 드는 그림체나 제목을 찾으면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그리고 휘릭 휘릭, 손쉽게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로 입장했다. 그리고 지금의 내 현실은 잊었다. 당시 내게 웹툰은 숨 막히게 괴로운 새벽을 가장 효과적으로 버틸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어느 새벽, 운명처럼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이라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은 주인공 '가야'가 출근길 직장 상사에 이렇게 문자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너무 우울해서 오늘은 일 쉽니다.


입사한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한 결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게임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심한 향수병을 앓는다. 한국의 모든 것이 그리워 우울했던 그녀는 충동적으로 회사 앞에서 발길을 돌려 하염없이 걷는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우연히 태권도장에 들어선다.


다른 사람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잠시 구경만 하려던 그녀는 어느새 멤버십 등록도 하고 태권도복까지 사서 도장을 나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그걸 보고 '앗, 충동 구매 뺨치는 충동 등록이네!' 하고 재미있어하며 결국 아침이 될 때까지 121개에 달하는 모든 연재물을 정주행하고 말았다. 이런 건 충동 웹툰질(?)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하.


웹툰이 시작되는 초반에 가야는 직장에서 먹고 싶은 점심 메뉴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할 정도로 소심하고 맥 없는 캐릭터였는데, 뒤로 갈수록 사람이 점점 단단하게 성장하더니 마지막 화에서는 이런 멋진 말을 하며 근육질의 어깨 위로 분명 태권도 도복이 들어있을 가방을 턱, 올리 문을 나서는 세상 강인한 언니가 되어 있었다.


태극 팔장이 의미하는 것은 곤.
땅이라는 의미이고,
처음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와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뜻이다.

이 길을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사실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걷고 걸어서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비로소 돌아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그 길은 정말 아름다웠고 골목골목에 놀라움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아,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 피곤했던 어제의 나와는 이미 조금쯤 달라진 기분이었다. 그래, 태권도로구나. 내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은.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집 근처에 있는 태권도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지금 누구보다 간절히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있는 내게, 태권도가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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