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3년 전 4월에 결혼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아이가 찾아왔다. 덕분에 우리는 첫 결혼기념일부터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연애 때 서로를 위한 각종 이벤트를 하는 재미로 지내던 우리는 난생 처음 하는 부모 노릇에 혼이 빠질 대로 빠져버려서 결혼기념일이고 뭐고 날짜를 잊지 않으면 다행인 지경이 되었다.
첫 결혼기념일엔 그나마 아이가 배 속에 있고 입덧도 끝난 상황이라 제법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했었는데, 아이가 세상에 나온 뒤에 찾아온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는 부모님께 아이를 잠시 부탁하고 둘이 나가서 삼겹살 한 판 구워 먹고 오면 그걸로 감지덕지했다. 그리고 얼마 전 세 번째 결혼기념일이 찾아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5시간의 시간이 생겼다는 것. 만세! 결혼기념일이 다가오자 내 안에선 흥분에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하고 싶다. 나도 새롭고, 신나고, 즐겁고, 특별한 무엇인가가 하고 싶다! 학교 다닐 때처럼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볼까, 덕수궁에서 한다는 전시를 보러 갈까, 영화도 보고 싶다. 5시간 안에 그걸 다 할 수 있을까. 혹시 잠깐 바다를 보러 갈 수 있을까?’
내 마음은 서울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다가 강릉 바다까지 달려갔다. 그런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뭔가 마음이 확 동하는 게 없었다. 막상 하려니 피곤했다. 무리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 운전하다가 길에서 스치듯 봤던 데이 캠핑장이 떠올랐다. 데이 캠핑은 말 그대로 잠을 자지 않고 해가 떠 있는 동안만 놀다 오는 캠핑장이다. 텐트도 없고, 1박은 꿈도 못 꾸는 우리에게 정말 딱이잖아! 이도 저도 다 맘에 차지 않는다면 그냥 거기 가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다 오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휴대폰을 들어 예약을 했다. 결혼기념일 전날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캠핑장에 도착하니 우리밖에 손님이 없었다. 거의 빈손으로 간 남편과 나는 텅 빈 텐트에 누워 각자가 골라온 책을 한 권씩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만 공기를 가득 채운 고요함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덕수궁도 강릉도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듯, 손에 들린 메리 올리버의 책 <완벽한 날들>에서 시 한 편이 걸어 나와 말을 걸었다.
상상할 수 있니?
- 메리 올리버
예를 들어, 나무들이 무얼 하는지
번개 폭풍이 휘몰아칠 때나
여름밤 물기를 머금은 어둠 속에서나
겨울의 흰 그물 아래서만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지금, 그리고 지금ㅡ언제든
우리가 보고 있지 않을 때.
물론 넌 상상할 수 없지
나무들은, 조금만 여행하기를 소망하며,
뿌리부터 온몸으로,
춤추지 않는다는 걸,
갑갑해하며 더 나은 경치, 더 많은 햇살,
아니면 더 많은 그늘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물론 넌 상상할 수 없지 나무들은 그저
거기 서서 매 순간을, 새들이나 비어있음을,
천천히 소리 없이 늘어가는 검은 나이테를,
마음에 바람이 불지 않는 한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음을
사랑한다는 걸,
물론 넌 상상할 수 없지
인내, 그리고 행복, 그런 걸.
나는 어쩌면 여행을, 더 많은 경치와 햇살을, 그리고 그늘을 원했던 것 같다. ‘인내’를 빼면 설명할 길 없는 출산과 육아의 숲을 지나며 ‘지금’이 아닌 다른 특별한 시간을 계속 그리워했나 보다. 하지만 지금 나를 둘러싼 채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나무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래서 행복하다는 걸 이 시를 쓴 작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덕분에 이제 나도 안다.
눈을 감고 나무의 소리를 듣는다. 그간 함께 번개 폭풍이 휘몰아치는 시간을 견뎌준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다정히 손을 잡아 본다. 가만히 상상해 본다. 인내, 그리고 행복, 그런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