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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미 선 Nov 15. 2023

아줌마  탐구하기(1)

아줌마는 용사

오래전에 어느 백화점에서 압력솥을 반값에 세일한다고 선전을 했다.

아줌마들이 평소 선호하는 제품이었다.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 밥솥이나 주방기구가 보이면 아차!

저건 내가 점찍어 둔 건데 하면서 부러워한다.


자기 옷은 사지 않아도 주방용품에는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바로 아줌마들이다.

그런데 그 갖고 싶었던 밥솥이 반값이나 세일을 한다니.

오! 기회는 이때다. 

개점시간 훨씬전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아줌마가 누구인가!

아줌마는 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절친과도 같은 밥솥을  싸게 살 수 있다니 보무도 당당히 백화점을 향했을 것이다. 

휘파람까지는 아니어도  콧노래를 불러가면서.


아줌마들이 새벽부터 몰려든 그곳은 백화점이 아니라 오일장 분위기였다. 

아니 밥솥이 여기뿐이 없나.

모여놓고서도 민망했을 거다.

쪽팔리는 건 잠깐이고 원하는 물건을 사겠다는 집념은 잠시의 

민망함을 지우기에 충분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도 이상해서 "여기 무슨 일 났어요?"

얘기를 들은 사람이  아줌마라면 지체 없이 긴 줄 뒤꽁무니에 자신을 세웠을 것이고,

아저씨 라면  "별 이상한 여편네들 다 봤네. 공짜도 아닌데 뭘 이렇게 호들갑 들이람."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을 것이다.


백화점 앞에 줄을 선 아줌마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오픈 런이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운동회 때 요~이~ 땅 화약총을 쐈을 때처럼  죽기 살기로 뛰어갔다.

그전까지 잘 유지되던 줄은 순식간에  와장창 무너지고  힘 좋고 달리기 잘하는 선수가

선두가 되었다.     


교과서에서 윤리 교육을 철저히 받은 아줌마는 이런 염치없는 여자들이

어딨냐고 게거품을 물었다.

그건 금세 허공에서 사라지는 쓰잘데 없는 말부스러기였다.

누가 뭐라든 밥솥을 향한 열망은 아줌마를 용사로 만들었다.


머리에 라면을 뒤집어쓴 아줌마도, 뚱뚱보 아줌마도, 갈비씨 아줌마도 나이와 교양과 외모를

무시하고 달렸다.
뛰어들어가 먼저 그것을 낚아채다가 넘어지고 야단이 났었다고 한다.   

세상에 그게 뭐라고 그렇게 콧대 높던 안방마님들이 난리를 쳐야만 했을까.


 참으로 원시적인  판매방법이요, 무지한 구매방법이었다.

그러다  누구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것인지 매스컴에서 주목할  일이었다.

조금 더 격해지면 머리 끄덩이라도 잡고 늘어질 판국이었다.  
그때 백화점 직원의 말을 인용하자면
`물소 떼들이 돌진해 오는 듯해서` 모골이 송연했었다니
아니 보고도  그 살벌한 풍경이 훤하다.            
그런 진풍경을 연출할 사람은 아줌마라는 신분뿐이 없을 것이다.


조금 싸다 싶으면 만사 제쳐놓고 뛰어가는 것이 아줌마 그녀들이다.            
그녀들도 처녀시절엔 절대 그렇지 않았다.

입 꼬옥 다물고 마스카라 눈썹을 처마 삼아 눈을  내리깔았다.

누가 묻는 말에만 겨우 대답하던 부끄럼 많은 아가씨였다.

반값 아니라 공짜라고 해도 아가씨는 밥솥을 향해 돌진할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거친 여자로 만들었을까.

아줌마는 생활전선 최전방에 선 용사다.

이 거친 세상에서 내 가족을 온전히 보존하려면 거세야 하고 억세야 하고

염치를 물 말아먹어야 한다.


얼굴에 화장품이 아니라 뻔뻔함을  잔뜩 바르고 나선 아줌마.

생존의 룰 이란 체면이나 부끄러움보다 선점의 고지가 중요함을 아는 사람이다.

바로 코 앞에 있는 마트보다 버스를 타고  재래시장으로 향하는  여자.

그곳에서 열무 서너 단, 배추 서너 개 를 사들고  죽어라 들고 오는 억수로 힘이 센

인간이 아줌마라는 종족이다. 


아줌마의 입에선 허연 입김이 굴뚝을 이루고 있어도 보따리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어떻게 산 건데.

쇠심줄처럼 질긴 생명력이 거기 재래시장 바닥에서 맴을 돌고 있다.

무소의 뿔처럼.


소설가 김훈 작가는 제발 노점상 할머니들에게 덤 받아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건 소설 속에서나 쓰라고 일축한다.

아! 고 물가 시대에 콩나물 하나라도 뺏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줌마의 근성을

누가 말리랴.

그 누구도 못 말린다.


크림슨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껌을 짝짝짝 씹어가면서 불어 터진 발을

구두 속으로 욱여넣는 아줌마라고 칭했건만,  그것도 그러든지 말든지

내 멋에 산다고 뒤엎어 버리는 무소불위의 인격체이다.


기차를 타든 버스를 타든 옆에 누가 있으면 무조건 말을 걸어오는 친근하다 못해 

푼수쟁이 같은 사람.

그녀들은 말 몇 마디 주고받으면 벌써 보따리를 뒤적여 과자든 사탕이든 꺼내든다. 

부스럭거리고  사탕을 건네면서  "이거 하나 먹어봐요."

어느 시장에서 샀으며 얼마짜리라고 묻지도 않은 오버 스위치를 누른다.


그러다가 작년에 먹던 된장, 고추장 묵은지까지 화제 삼아 너스레를 떤다.

친화력의 대가들이다. 

언제 봤다고 언제 볼 거라고 이리도 친절하고 끈끈한지 도무지 이해 불가다.

情(정)으로 똘똘 뭉친 초코파이 같은 여자들이 아줌마인 것이다.

아마조네스 같다가도 왜 이리 신파극에 민감한지.


TV 드라마에서  누군가가 울기만 하면 손수건이 다 찢어지도록 울어대는가 하면,

 막장 드라마에서는 그 주인공에게 흥분하다 못해 삿대질까지 일삼는 사람들, 

이런 군단이  아줌마로 분류된 정의의 사도들이다.

사과를 깎아놓고서도 뼈다귀살까지 아낌없이 발라먹는  알뜰함의 아이콘이며,

식구들이 먹다만 밥까지 모조리 뱃속으로 쓸어 담고 왜 자꾸 살이 찌는지

모르겠다고 불만하는 미련쟁이가 또한 아줌마인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서 나는 아닌데 이거 너무 아줌마를 비약한 거 아닌가?

따질 만도 하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동사가 끝에 오는 핵끝머리 언어가  바로 한국어인 것이다.

여기까진 내 세대 즉 베이비부머 세대 아줌마들의 전형이다.

前期(전기) 아줌마들의 된박같은 인상주의를 일컫는다.

뻔뻔함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어도 여전히 한 통속이다.

우리 세대 엄마들은 더 했고 그 이후 세대들(1955~1974) 

베이비부머 전, 후기 아줌마들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아줌마가 금줌마가 되었다.

도도하고  앙칼지고 세련되고 가방끈이 길다.

길다 못해 질질 끌리게 생겼다.

지금 젊은 아줌마들은 밥솥을 아무리 반값에 판다고 해도 줄을 서있다가 뛰는

모험은 하지 않는다.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통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쇼핑을 한다.

품질을 비교하고 가격을 따지고 디자인을 보면서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맘대로 고를 수 있다.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다른 제품과 비교도 해 본다.

아니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장바구니를 비운다.


뒤통수가 화끈거리지도 않고 미안하지도 않다.

이 얼마나 편하고 힘 안 드는  시대를 만끽하고 있는 것인지.

그 덕에 와글와글 한꺼번에 태어난 우리 세대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손가락의 효능을  무한대로 체험하고 있다. 


가정을 위해 체면이고 멋이고 다 팽개치고, 

구질구질했던 옛날 엄마들보다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이 뚜렷한가.

자신을 가꿀 줄도 알고 몸빼 바지로 후줄근히 자존감을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결국은  나 개인 보다 우리 가정을  먼저 생각하는

공통분모를 소유한 사람들이다.


자기 나이보다 훨씬 이쁘고 젊다고 하면 폴짝 뛰고 좋아라 하다가도,

제 나이를 봐주면 기분 나쁘다고 투덜댄다.  

결혼해서 아줌마가 되었어도 누가  "아줌마."라고 부르면 

"뭐, 아줌마?" 

아줌마라  부른 사람을 신발 끝에서 머리끝까지 째려보며 아줌마이길 거부한다. 

분수 모르고 아줌마의 반열에 끼기 싫어하는 것도 아줌마의 속성이다. 


누추하지 않아도 아줌마의 본질을 잃지 않은 현대판 아줌마와

구시대 아줌마의 전형들 모두는  `용사`다.

그녀들의 애교적 뻔뻔함, 그러나 남을 해코지하지 않는 정과

알뜰함이 있기에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오늘도 내일도 흔들림 없는 튼튼함으로 지켜지고 있다.         

구시대, 현시대 그것은 엄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이어진 고리다. 

여자라는 동질감 안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살아오면서 세대 간의  간극이 없을 순 없다.

촌스러우면 촌스러운 대로 세련되면 세련된 대로 우리들 모두의 엄마들이다.

동시에 한 아저씨의 아내이고, 언니이고, 누나다.

또한  이모이고 고모인  것이 아줌마의 위치다. 


아가씨의 전성시대를 넘어 아줌마란 전선으로 넘어간 그녀들.

그녀들에게 있어  그 기간이 생애 최고로 긴 시간이다. 

긴 시간의 안배는 자녀들을 성장시키는 동력이 된다. 

힘들지만 돌아보면 딱 그만큼 위치로 돌아가고픈 시절이기도 하다. 

아가씨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닌 중간 위치, 거기서 활기를 자글 자글 끓이는 시기다.


아줌마.

그 단어는  `용사` 와 맘먹는 단단함의 결정체다.

전 세계를 묶는다 해도 아줌마라 칭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같다.

가정의 울타리를 날마다 정비하는 가정관리사, 그 또 다른 이름이 아줌마다.

아~줌~마!

                                 

유화로 그린 필자 그림. 우산처럼 아줌마는 누구에게 라도 우산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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