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사
"이봐요, 김여사."
`김여사?`
운전을 잘 못하는 불특정 다수의 아줌마들.
그녀들을 `김여사`로 통합했다.
사회적 합의를 한 건지 어느 날부터 거리에서 `김여사`가 등장했다.
존칭인척 슬그머니 여사를 붙였지만 존칭뒤에 숨은 알맹이는 비웃음이었다.
운전이 능숙한 남자 눈에는 그녀의 미숙한 운전이 여~엉 못마땅하다.
그럴 때 `김여사`가 튀어나온다.
김여사는 하대의 표현이요, 빈정거림의 발상이요, 욕의 다른 가닥이다.
`그렇게 운전을 못하면서 뭐 하러 차를 끌고 나오냐.`
`주제파악도 못하고 무슨 운전을 한다고.`
`도로가 막히는 게 다 저런 김여사들 때문이라니까.`
김여사도 운전이 두렵고 어설퍼서 웬만하면 그것을 안 하고 싶다.
그럼에도 다리를 덜덜 떨면서 가속 페달을 밟는 것은 불편함 때문이다.
맨날 남편에게 "나 어디 좀 데려다줘요."
급하면 남편을 불러 세우고 아쉬운 소릴 해야만 한다.
게다가 지인의 차를 얻어 탈 때도 뒷 좌석에 앉아 왠지 모를 눈치를 본다.
운전기사인 지인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고 해도 "담에 내가 밥 한번 살게."
선수를 치면서 미안해한다.
보릿자루 실려가듯 가만히 앉아서 운전기사의 심기를 살펴야 한다.
차를 얻어 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그럴 수는 없다.
장을 봐올 때도 보따리는 또 얼마나 무거운지.
무, 배추, 양파, 양배추, 단호박 등등 농산물들은 하나같이 무겁다.
배달과는 상관없이 장을 봐와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쩔쩔매고 농산물들을 끌어다 놓고 앉아있자니 한숨이 나온다.
아무도 수고스러움을 몰라주는 것에 야속해진 그녀는 그제야 차를 마련할 궁리를 한다.
그래 바로 그거야.
온 세상이 꽁꽁 얼어버린 날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발을 동동거리지 말자.
폭염 속에서 몇 걸음 상관에 놓쳐버린 버스로 열받지 말자.
버스에 실려오면서 이리저리 씰그럭 거리지 말자.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밀려드는 불편함이 그녀로 하여금 간절히 차의 필요성을
각인시켜 오기 시작했다.
문득 면허증이 떠올랐다.
어렵게 따낸 운전면허증을 한 번 꺼내보자.
참으로 오랜 시간 어둠을 지키던 면허증은 그제야 밖으로 끌려 나왔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인장이 외면했던 면허증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면허증이 햇빛을 보던 그날 저녁에 역사는 시작되었다.
"저기 있잖아. 나 아무래도 차를 한대 사야겠어."
"차를 산다고? 왜 갑자기 차를 산대?"
"나도 이젠 대중교통 말고 내 차를 좀 타고 다니고 싶어서."
"이 사람아. 당신 같은 사람은 차를 절대 끌면 안 돼."
운동신경 부족, 길치, 순발력 부족, 공감각 부족 차를 끌지 말아야 할 조건은 넘쳐났다.
그녀의 머릿속엔 차를 사주기 싫어서 하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운전을 하겠다는 자와 하지 말라는 자가 싸우기 시작했다.
2,3차 대전이 일어나고 침묵이 며칠간 이어졌다.
아무리 운전을 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나왔어도 아직 안 해본 거였다.
왜 해보지도 않고 하지 말라는 거냐.
차 없는 설움과 불편함을 알기나 하냐 말이다.
생각처럼 운전이 그리 쉬운 게 아니란 걸 안다.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차에 대해선 어떤 부품이 무슨 역할을 한다는 걸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다.
그래도 해보고 싶다.
맨날 "사지 마" 하면 "알았어"
"하지 마" 하면 "알았어"
순종만이 미덕인 줄 알고 살아온 그녀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러다 만날 남의 뒤꽁무니에 실려다니다 생을 마감하겠다 싶었다.
그것이 싸움의 발단이 되었고 집안은 砲煙(포연)에 휩싸였다.
포연이든 게거품이든 그녀도 반기가 필요했다.
이번 만은 양보 안 하련다.
팽팽하게 맞서다가 둘은 절충에 들어갔다.
차를 사되 차 값은 그녀의 몫이라고.
안된다는 것을 강제로 추진했으니 그렇게 하자는 거였다.
따지고 보면 절충도 아니다.
에라이~
치사하다.
그래도 산다.
뒤늦게 맞는 엔트리 카는 감격 그 언저리였다.
이제는 남의 차 뒷자리가 아닌 앞자리로 위치가 바뀌었다.
6년 전 그녀는 그렇게 김여사가 되었다.
김여사든 이여사든 누가 뭐라 불러도 일단 가보기로 했다.
뜯어말리던 사람은 자청해서 연수를 해주겠다고 나섰다.
여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주차문제로 둘이는 또 맞짱을 떴다.
차가 술을 마셨는지 갈지 자로 도는 걸 보더니 그녀의 목을 확 잡아 뒤로 돌리면서
제대로 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남편한테 연수받는 거 아니라는데 연수받다가 열받아서 이혼한 사람도 있다던데.
바보니 멍청이니 그런 소리는 안 했지만 말보다 액션이 앞섰다.
어깨를 부딪히고 손목이 꺾이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더 이상 연수를 연장하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 시작했으니 한 번 혼 좀 나보라는 심보다.
한동안 차를 그대로 세워두고 또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러려면 뭐 하러 차를 샀냐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녀는 다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운전대를 잡았다.
어떤 날 슬금슬금 기어가다가 거북이 운전수는 교차로 직진 신호 앞에서 턱 서 버렸다.
주황색 불이 금세 빨간 신호등으로 바뀐 것이다.
그냥 지나가야 하는데 어쩐지 빨간불에서 지나가면 순사가 잡아갈 것만 같았다.
좌회전하는 차량들의 흐름을 방해하고 떠억 길 한 복판에 똬리를 틀고 있자니
좌회전 차량들의 눈매가 매섭다.
김여사는 얼굴을 핸들에 맞대고 빠꼼하게 신호등을 올려다보았다.
원자폭탄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처럼 포복자세다.
신호등은 그날따라 왜 그리도 느린지.
누군가가 그녀의 자라목을 확 잡아 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초보운전은 욕을 바가지로 먹는 거라지만 욕이 아니라 매를 맞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뜯어말렸건만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다.
어떻게 쟁취한 운전인데.
거북이 운전수는 어떤 날 또 살금살금 화물차 뒤를 쫓아가다가 탁 멈춰 서고 말았다.
달리던 화물차가 부동자세다.
고장이다.
하필 내 앞에서 고장이람.
옆 차선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뒷 차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 오고 있었다.
그녀의 가난한 운전실력으로는 뒤차들의 행렬을 파헤칠 능력과 오기가 없었다.
그럴 때는 창문을 내리고 팔을 흔들어 끼어들기를 시도해야 한다고 들었다.
조심스럽게 실행은 했지만 실효는 없었다.
처음엔 천천히 미적지근하게 팔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팔이 떨어져 나가도록 흔들어 대도 누구 하나 양보가 없다.
허참, 세상인심이 뭐 이렇게 사납단 말인고.
조금만 멈춰주면 거북이 운전수는 팡팡 신이날텐데.
어찌하여 도로 위의 운전자들은 올챙이 시절을 잊었을까.
이젠 펑펑 울고 싶다.
슬프고 초라하고 처량하고 바보 같다는 비감이 몰려오고 있을 즈음,
뒤차가 빵빵 경적을 울리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어떤 아저씨가 얼른 빠져나가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녀가 김여사 라는걸 직감했다.
아저씨 센스가 최고다.
사람은 이래서 눈치와 센스가 있어야 해.
아저씨 차가 멈추자 뒤따르던 차량들이 일제히 멈춰 섰고 그녀는
어설프게 차선을 바꿀 수 있었다.
차선을 바꾸고 신이 나서 생전 처음으로 비상등을 켜보는 귀염을 토했다.
아저씨는 김여사가 귀엽다고 하셨겠지?
"아저씨 무조건 건강하세요."
"아저씨 평생 무사고 하세요."
"아저씨 하는 일마다 대박 나세요."
"아저씨 행복하세요."
모든 덕담들을 그 아저씨에게 팡팡 쏴주고야 말았다.
도로에 갇혀있다 고여오는 눈물을 퍼낼지 참을지,
우물에 빠져서 헤매고 있을 때 아저씨는 밧줄을 던져준 은인이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사람은 선행을 하면 반드시 덕담이 돌아온다니까.
잠깐 멈춰주면 덕담이 돌아오는 것을.
덕담이 좋은지 악담이 좋은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간 바보들 같으니라고.
덕담은 좋은 싹을 틔워 반드시 그 말을 들은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줄 거다.
중얼거림 반, 눈물반으로 차를 몰아가면서 어리숙한 거북이는 세상도 함께 배워갔다.
느리게 간다고 그녀의 차 앞에 탁 서버리는 무서운 보복운전도 경험했다.
차 뒤꽁무니에 대고 갑자기 경적을 울려대는 바람에 심장이 덜컹거리기도 했다.
이참 저 참 험로를 밟아가면서 김여사는 성숙해져 갔다.
김여사에서 김기사로 자리 바꿈을 해가면서.
그녀가 남에게 받은 폐해만큼이나 그녀 또한 초보운전의 미숙함으로
알게 모르게 남을 신경 쓰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도로 위에서 본의 아니게 주변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거북이 김여사 옆을 지나갔던 모든 운전자들에게 이 공간을 빌려 고마움과 사과를 표한다.
운전에 미숙한 사람은 밉긴 하지만 불한당 까진 아니다.
본의가 아니기 때문에.
본의냐 아니냐에 따라서 불한당의 경계가 정해진다.
지금도 도로 위에는 김여사들이 많다.
그녀들은 집을 나설 때부터 벌벌 떤다.
차선 변경도 못하고 직진만 하다가 서울서 부산까지 갈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들에게 김여사라고 빈정거리지만 말고 바쁘면 먼저 가고
안 바쁘면 그냥 쫓아가면 된다.
백미러 볼 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김여사에게 쓸데없이 빵빵거리지 말자.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앞차를 냅다 걷어찰지도 모르니까.
누군 뭐 처음부터 잘했나.
다 버벅거리면서 배운 거지.
오늘도 도로 위에서 벌벌 떨고 있을 김여사들 파이팅!
들꽃 원형 리스. 유화그림,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