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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미 선 Jan 03. 2024

아줌마 탐구하기(7)

신수가 훤해지셨수

우리가 요리할 때 매일 쓰게 되는 시커먼 액체가 있다.

시궁창 물도 아닌데 시커멓다. 

염분과 발효가 천생연분으로 얽힌 이 시커먼 액체는 다름 아닌 간장이다.

왠지 구정물 같은 느낌이지만 이것이 요리에 꼽사리를 끼면 맛의 변화가 일어난다. 


맛의 변화가 일어나는 간장이라도 조선간장은 짜기만 하다.

국 간장으로는 적당하지만 다른 음식에 그대로 쏟아부었다간 소태가 된다.

과용했을 때 조선간장은 오만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오만상을 찌푸리지 않고 맛을 내려면 아무래도 마술이 필요하다.


마술이라?

조선간장을 지지고 끓여서 현대 간장을 만들면 그야말로 풍미 진진한 맛 간장이 된다. 

이 맛간장으로 어떤 반찬이라도 만들어 먹어본다면 다른 간장은 이미 가치를 잃는다. 

이것이 아니면 소태 거나 쓸모없는 구정물에 불과하다. 

조선간장 자체는 국 간장으로서의 역할로 족하다.

그만큼 맛간장이 부리는 화려한 풍미는 절대적이다. 


이 맛간장의 원료는 조선간장인데 나는 부끄럽게도 장을 담글 줄 모른다.

햇수로 5년 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된장, 고추장, 간장은 걱정 없이 얻어다 먹었다.

우리 시어머니로 인해 장류가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문제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가 장으로 아쉬움을 겪자 지인이 한 말이 있다.

"아이고야 어머니가 안 돌아가셨어야 하는데."

장류를 위해서 어머니는 늙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 평생 부엌과 장독을 지키는 

조왕신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는데 어머니는 훌쩍 하늘나라로 가버리셨다. 


"장이고 뭣이고 나는 갈란다."

그 많던 장독들을 다 팽개쳐 두고 가버리셨다. 

우스개 소리이긴 하지만 타격이 크다.

그렇다고 하늘나라로 편지를 보낼 수도 없다.

전화로 "어머니 지금 간장이 떨어졌는데 보내주실 수 있나요?"

이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진작에 쫓아가서 배워둘걸.

언제든 `걸`이라는 단어는 후회와 동의어다. 

`걸`은 꼭 놓친 버스 뒤꽁무니에 손 드는 격이다. 

그러다 매연만 실컷 마시고 중얼거리기 일쑤인 단어가 `걸`이다. 


아무튼 걱정 없이 장류를 조달받다가  갑자기 공장문이 닫혔으니, 

어떡하든 스스로 해결해야 될 입장이 되었다. 

다행인 건 시중에 간장, 된장, 고추장이 넘쳐난다는 거다.

오!  


내가 맛간장과 만난 것은 15년 전이다.

미용실에 파마를 하러 갔는데 그날따라 손님이 너무 많았다.

한쪽 구석에 앉아 잡지책을 넘기다가 나는 신대륙을 발견했다.

거기 맛간장 달이는 법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아차 이거다. 이거야 이거.`


그때부터 시어머니의 간장은 변주를 시작했다. 

지금은 시중에 나와있는 국 간장과 진간장을 섞어 쓰지만, 

그때는 어머니 간장으로만  맛간장을 만들었다.  

물을 붓고 덜 짜도록 맛을 보면서 염도를 조절했다.


이리하여 이 여자는 맛 간장의 중독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맛간장을 달일 때는 이렇게 많은 재료가 들어간다.

마늘, 양파, 대파, 고추, 멸치, 사과, 대추, 무, 당근, 파프리카, 표고버섯,

건새우, 건 홍합, 다시마.

참으로 많기도 하다.


물론 개인 식성에 따라 이 재료들을 가감할 수 있다.

엿장수 맘이지  정형화된 틀은 아니다. 

때론 건오징어와 북어대가리도 들어갈 때가 있다. 

파뿌리도 곁들여진다.

그 재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레시피래야 조선간장이 1L라면 진 간장은 2L가 되면 좋겠다.

둘을 합쳐서  꺽뚝꺽뚝 모양새 없이 썰어낸 재료들을 쏟아 붓기만 하면 된다. 

끓는 온도는 처음에는 강불, 중불, 약불로 조절해 가며 야채들이 익어가는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 

뜨거운 곰솥 안에선 모두가 죽겠다고 난리가 나지만 그럴수록  음흉한 미소를 짓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네가 죽고 내가 살자 이 나쁜 심뽀를 어찌하랴. 

재료에 따라서도 맛에 차이가 난다.

더 구수하게 할 것이냐 달게 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비율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는 적당히 간장이나 재료들을 조절해야 된다. 


번거롭지만 두고두고 내 곁을 지켜줄 맛간장은 음식에 있어 진리다.

당장 만들 시간이 없다면 언젠가는 꼭 해봤으면 좋겠다.

이 고급진 재료는 독자들을 특급 호텔 주방장으로 위치를 바꿔줄 것이다. 


이렇게 재 탄생된 간장은 생선을 찜하거나 나물을 무치거나 갈비를 재거나 김에 간장을 찍어먹거나

어떤 것을 해도 변함없이 맛있다. 

무슨 요리를 해도 넘볼 수 없는 고급진 음식으로 태어난다.

이 간장으로 만든 요리를 먹어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떠들어댄다.

"여기다 이상한 마약 탄 거 아냐?"

"헛소리 말고 얼른 먹기나 해."


시중에도 맛간장이 나와있긴 하다.

나와있는 맛간장은 집에서 정성 들여 고아낸 맛과는 비교가 안된다.

한 마디로 풍미가 덜하다.

상업성을 띈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시중에 나와있는 맛이 집에서 달인 맛과 같다면 굳이 그 복잡한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

다 만든 것은 하룻밤 푹 숙면을 시켜주고(병 주고 약 주고) 

중간에 깨지 않도록 뚜껑을 덮어둔다.

이튿날 재료들을 꼭 짜서 걸러내고 생수통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하면 완성이다.


이렇게 한 번 만들어 두면 속까지 자긍심이 차오른다. 

어떤 나물이든 참기름, 참깨, 아몬드가루 마늘만 넣어서 조물조물 무쳐주면 

그날은 만사형통이다.


남편에게 아쉬운 소릴 해야 될 때.

여행을 가고 싶은데 남편의 허락이 필요한 시점에.

뭘 좀 먹고 싶은데 그게 비싸면.

이를테면 참치나 킹크랩이 먹고 싶을 때. 

요럴 때 맛간장의 효력을 이용하면 된다.


쇠갈비나 돼지갈비도 이것과 만나면 혼수상태가 된다. 

금세 쪄낸 고기를 따끈한 밥 위에 얹어 남편의 수저 위에 

올려주고 코맹맹이 소리로 "맛이 쪄?"

물어본다면 그 길로  소원은 고속도로를 타게 된다. 


그 무엇이든 이 매개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시켜 줄 것이다.

맛있는 것과 마누라의 비음은 환상의 하모니로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 댈 것이 분명하다.

이 단순한 진리를 꼭 이용해 보면 좋겠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일등 재료의 활용이야말로 주방을 책임지는 

아줌마의 책무다.


그냥 마음이 허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도 깨소금, 참기름, 고추장에 이 시커먼 액체만 약간 넣고 비벼 먹어도 

기분이 둥실둥실 뜬다.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수단이지만 그 위에 스스로를 다독이는 힘이 있다.

특히 맛있는 음식은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으면 세상이 다 채워지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맛간장은 단순하게 맛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도 연결되어 있다.

다양한 재료들이 뿜어내는 각각의 조화로움은 이미 보약의 경지다.

간장색깔이 변하진 않았지만 그 속엔 많은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몸에 스며들면 보약이 될 간장은 시치미를 뗄 뿐이다.

으흠, 역시 시커먼 건 음흉해.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힘들다.

무엇이든 다 마찬가지다.

이것 또한 온통 집안이 짠 냄새로 둥둥거린다.

여기저기  튀긴 간장 자국들이 관절들을 마구 부린다. 

그럼에도 힘들단 말이 뒤로 밀린다.

가치 있는 일은 지난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우직하게 서지 못한다. 


새해다.

새해가 시작된 이 마당에 시커먼 간장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그만큼 간장은 의미심장하다.

한 가정의 주방을 책임지고 가족의 건강을 총괄하는 아줌마들.

그 아줌마들이 맛난 음식으로 대장금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한 해는 또 흔들림 없이 충만할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족들 안색이 훤해지면 좋겠다.

그러면 간장을 소개해준 중매쟁이도  기분이 좋지 않을까?


살이 너무 쪄서 지금 다이어트 중인데  이렇게 맛있는 재료를 알려주면 어떡하라고.

이건 고문이고 범죄요 범죄.

이렇게 투덜거려도 할 수 없다. 

범죄도 요렇게 귀여운 범죄는 얼마든지 저질러도 좋다.


 옛날 어르신들은 누굴 만나면 "신수가 훤해지셨수." 이런 말을 많이 했다. 

그 뜻도 모르고 고작 다섯 살 배기 여자 아이는 옆집 할머니한테 

"신수가 훤해지셨수." 했단다. 

그 말은  옆집에서 옆집으로 퍼져나가 웃음거리가  되었단다.

두고두고 엄마가 들려주던 어린 시절 얘기는 이제 여기서 다시 맴을 돈다.


"身手(신수)가 훤해지셨수."

올 청룡의 해는 이렇게 좋은 덕담으로 시작했으면 한다. 

새해에 거는 소망도 누구나 1순위가 건강이다. 

부디 맛간장의 위력으로 독자들 모두가 "신수가 훤해지셨수."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한 해 복 받은 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福이 별 건가!

건강해서 활력이 넘치면 그게 복이지.






                              맛있어져라!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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