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문밖을 나서기 전 남편의 양말까지도 복장과의 조화를 생각하는 여자가 마누라의 본질이다.
시어머니가 물려준 유산?을 덥석 받아 들고 이리저리 키워갈 준비를 해야 한다.
시어머니는 "이제 난 모른다."
"네 신랑이니 네가 알아서 해라."
"죽이든지 살리든지."
인수인계를 마친 시어머니는 열두 폭 치맛자락을 휘감고 휙 돌아섰다.
드세던 젊은 날의 氣(기)는 쇠잔해지고 그 자리를 마누라가
꿰차고 앉아있다.
이겼다.
할아버지는 백기.
할머니는 청기.
백기의 손이 바지랑대처럼 높게 솟는다. 항복이다.
둥둥둥 승전고를 울리는 사람은 마누라다.
웨딩마치를 울리기 전과 울리고 난 후의 태도는 노란색과 빨간색이었던 것이다.
"뭐, 세상 다 내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애시당초 믿지도 않았지만 그 생각을 하면 여자는 더 부아가 치민다.
이런 인간을 남편으로 둔 자신의 머리를 콩콩 찍어댈 뿐 다른 방도가 없다.
아무 때나 배가 아프다.
그녀의 뱃속엔 메탄가스가 한 자루나 들어있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걸린 것이다.
그녀가 그 병에 걸린 것은 단순하게 늦게 들어온다는 이유가 아니다.
늦은 것까진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늦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스를 한 자루씩 뱃속에 보관하진 않는다.
문제는 엉뚱한데 있다.
비비는 힘은 악력이 아니다.
순전히 두 줄로 그어진 미간의 힘이다.
미간으로 누런 파운데이션과 빨간 크림슨의 그라데이션을 지우는 것이다.
금세 아무 일 없었던 듯 와이셔츠가 뽀얗게 피어난다.
그녀는 원상 복귀된 셔츠를 또 쪼그리고 앉아 다림질을 한다.
화딱지 그대로 한다면 쓰레기통에 확 처박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백화점에서 D마크가 찍힌 비싸게 산 옷이기 때문이다.
두 번 입고 버리긴 그녀에겐 너무 과분한 금액이다.
여자는 열심히 다림질을 하고 나서 또 그를 위해 콩나물 국을 끓이고 시금치를 무친다.
혼자 먹는다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혼자 먹을 때는 냉장고에서 보이는 것 아무거나 하나 꺼내서 물 말아먹으면 그만이다.
다른 집안일은 열심히 하면서 자신에게 붓는 정성은 미미하다 못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점심이 되어 혼자 밥을 먹으면서 물 반, 눈물 반의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그것은 쓰디쓴 약제처럼 그녀의 미각을 들볶는다.
순간 돌아가신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그리움으로 몰려든다.
부원병이 부모와 언니에게 옮겨가 위로를 구걸한다.
구걸한 위로는 땡그랑 빈 그릇에 던져지는 동전 마냥 왜소하다.
그 여자는 혼자 생각한다.
다음 생에는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닌 자신만의 생을 꾸려가련다.
불교의 윤회설이 그녀를 토닥토닥 어루만져 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이라 할지라도
잠시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다.
다음 생에 거는 기대는 그녀가 살아갈 동력으로 그녀를 이끌어준다.
허공이지만 허공을 향해 손을 내젓는 손짓으로 나마
현실을 무마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바로 마누라라는 사람이다.
남자가 흘린 변기의 노란 자국을 말없이 닦아대면서 혼자 모노드라마를 엮어가는 여자.
그 여자가 바로 마누라이다.
세상 남편의 성공은 마누라의 인내심 80%가 맺어준 결과다.
그녀의 인내가 있어 남자는 안심하고 성공 단추를 누를 수 있었다.
시댁에서의 부당한 대우도 참아내고, 억울해도 견디고 어이가 없어도 임계점의 한계를 지켜왔다.
무두질한 속을 감내하면서 그림자처럼 뒤치다꺼리를 한 마누라의 공로,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다큐멘터리다.
그곳에서 매사 퉁퉁증을 내는 마누라를 보면 그건 백 프로 젊은 날 속을 썩였다는 증거다.
아픈 사람이 안쓰럽고 쓰리다가도 예전에 남편이 한 행동을 곱씹으면
분하기 짝이 없고 밉기가 한량없다.
잊지 못하고 딸려오는 분노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꽂힌다.
이래서 우선 마누라에게 인정받는 게 중요하다.
보험?
그것보다 마누라 보험이 훨씬 더 효력이 크다.
젊은 날부터 남편 아닌 내편이 되어준다면,
마누라는 그것의 50배 100배로 남편을 위해 헌신한다.
쪼그리고 새우잠을 자는 남편을 보면 왠지 불쌍하고,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남편이 안쓰러워서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 씌워준다.
토닥토닥 지친 영혼을 잠재우면서.
그것이 마누라다.
마누라들은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웃고 남편의 냉혹한 말로 인해 운다.
마누라는 남편들보다 훨씬 감수성이 예민하고 시야가 좁다.
세상을 짚어보는 더듬이가 짧아 여리디 여리다.
그 사람이 마누라다.
이 세상 누구보다 건강을 위해 검은콩 반쪽이라도
남편의 밥그릇 위에 얹는 것이 철칙인 여자.
언제나 생선의 중간 부분은 남편 몫으로 생각하는 여자.
황소만 한 남편의 등뒤에 작은 점처럼 고요하게 서있는 여자.
그런 여자가 마누라인 것이다.
여자의 말을 짓뭉개고 문을 쾅 박차고 나가는 남자.
그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 걷는 노랫말이 있다.
내~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의 한 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
저~ 높은 곳에 함께 가야 할~ 사람
그대 뿐~~ 입~~ 니~~ 다~~.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를 찍는 여자.
이 푼수 같고 바보 같은 여자가 세상에 둘도 없는 마누라이다.
마누라가 바라는 건 별도 달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