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링크 경험
사람은 20대 후반부터 노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피부나 생활환경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개 그렇다는 것이다.
겉으로 확 눈에 띄게 노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진피층에서부터 보이지 않게 노화는 우리들을 희롱하기 시작한다.
요즘은 용모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
나이가 들수록 더더욱.
노화에 이끌리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나름 고육책을 쓴다.
늙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하지만 그 늙음을 거부하는 것도 인간인 것을.
그래선지 요즘은 아줌마인지 아가씬지 헷갈릴 때가 많다.
만약 헷갈린다면 그냥 "아가씨"라고 불러주면 좋아한다.
아가씨를 아줌마로 불러주면 흰자위가 넓어진다.
아줌마를 아가씨라고 불러주면 눈동자가 작아진다.
작아진 눈 속에는 눈웃음이 자글자글하다.
아가씨 와는 달리 아줌마가 되고 보면 자신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나보다 남편, 남편보다 아이들이 먼저다.
주걱에 붙은 밥을 떼어먹다가도 아이가 "앙" 울면 뛰어가고,
남편이 "왕" 떠들면 달려간다.
그 시절을 건너뛰고 나면 늙는 것이 눈에 띈다.
그때는 젊었으나 고달픈 시절이었다.
젊은 시절이었으니까.
양육의 고달픔에서 벗어나고 싶어 어서 세월이 가길 바라던 여자는 어느 날 문득 자신과 마주친다.
그 여자는 거울을 보다가 화들짝 놀란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엄마를 발견한 거다.
"어머! 우리 엄마가 왜 거울 속에 있어?"
어느덧 세월의 농간에 여기까지 온 아줌마는 그때부터 허무해지기 시작한다.
나도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TV에 나오는 여자들은 한결같이 젊고 이쁜데 나는 이게 뭔가.
갑자기 다른 세상에 떨어진 기분이 들고 멜랑콜리 해진다.
그녀들은 도대체 뭘 먹었길래.
뭘 했길래 저리도 나이와 상관없이 멋진가.
상대적 박탈감을 껴안고 여자는 혼자 생각한다.
100m 달리기에서 혼자만 뒤처지고 있는 자신에게 속도를 주문해보고 싶다.
그래!
한 번 가보자.
그녀는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선다.
거리의 빌딩숲에서 간판을 헤집으며 이리저리 눈이 바빠진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가 잘할까.
쑥스러운 감정을 베어버리고 주춤주춤 찾아간 무슨 클리닉.
문을 밀고 들어서니 20대부터 60대 초로의 부인네 까지 실내는 시장판이다.
소파를 싹 점령하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네들.
여자들의 작은 소망이 그곳에 집결해 있다.
여인네들 뿐 아니라 젊은 청년도 중년의 아저씨도 간간이 눈에 띈다.
예전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고 싶은 욕구가 숨김없이 출렁이고 있다.
그래 한 살이라도 더 젊어지자.
고인이 된 이주일의 `일주일만 젊었어도` 가 여기 포진하고 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세월에 조금이나마 보상심리를 끼얹어주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욕망이라는 전차에 올라탄 명제는 젊음과 노화의 알레고리다.
그것이 무슨 무슨 클리닉이라고 써붙인 피부과와 성형외과를 찾아가는 호기심이자 희망의 갈래가 된다.
엉거주춤 들어선 그녀는 둥그런 안내 데스크에 앉아있던 직원과 눈을 마주친다.
"어떻게 오셨어요?"
마음이 버벅거린다.
"시링크?"
"아, 네 슈링크요?
"그것 좀 알아보려고 왔는데요."
"저기 의자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이 가리키는 구석진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여자는 생각한다.
다음부턴 세련되게 "슈링크요."
슈링크(shrink) 줄어들다, 오그라 지다, 축소되다.
그러니까 도망간 탄력을 회복시켜 주는 시술이 슈링크라는 거다.
순간 대답한다는 게 "슈퍼 좀 알아보러 왔어요."
이러면 곧바로 문밖으로 밀려나 동네 귀퉁이 슈퍼를 알려줄 테니 제대로 외우자.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에 직원이 그녀를 손짓해 부른다.
쫓아들어간 곳은 작은 책상이 있고 두 개의 의자가 있는 좁은 룸이다.
"ㅇㅇ님 슈링크 알아보러 오셨어요?"
"네"
상담사라는 직원은 대뜸 그녀의 이름자 뒤에 "님"을 붙여서 호칭한다.
님이든 남이든 온 목적은 하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젊어지게 마술을 부려달라는 거다.
직원이 부스럭거리고 팸플릿을 내밀어 이런저런 설명에 들어간다.
300 샷인지 600 샷인지 샷이 뭔지도 모르는데 숫자가 올라갈수록
리프팅 효과는 커진다는 걸 알려준다.
이왕이면 600이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모습을 상상한다.
너무 젊어져서 남편이 옆집 여자로 착시를 일으키면 어쩌나 또 오버를 한다.
물컹한 액체를 따라 기계가 따끔따끔 바늘을 찌르듯 지나가고 시술은 단박에 끝을 낸다.
수술이 아니고 시술이니 흉터도 없다.
씀벅거리는 얼굴로 거울을 보니 젊어진 건지 더 늙은 건지 감이 오지 않는다.
금세 그렇게 티나 나려나 뭐.
어슬렁 거리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묘한 기분이 매달린다.
이 좋은 세상에 뭐 하나 현대문명의 혜택을 누려본다면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으로 구질구질했던 과거를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기분이다.
훌륭한 착각이지만 떠나버린 야속한 시간을 잠시 거두어들이고 싶다.
아줌마는 자신이 초라하거나 하찮은 인간이라고 생각될 때
작은 것에 집착하게 된다.
화장품 코너에 진열된 낯선 물건들의 정체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고,
왠지 나보다 우월해 보이는 것들에 딴지를 걸고 싶다.
흥!
나도 왕년에는 잘 나가는 여자였어.
6월의 장미처럼 도발적이고,
7월의 수련처럼 청초했으며,
8월의 수국처럼 탐스럽고, 고운 색깔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그 모습이 어디로 흘러갔다는 거냐.
그 시절이 어느 강물로 섞여 버렸다는 거냐고.
점점 늙은 호박을 닮아가는 처지를 어느 날 문득 뼈저리게 인지하게 된 아줌마.
아줌마는 처음으로 수술 아닌 시술을 경험하고 좋은 세상을 체험한다.
이참에 샤넬 이드라 뷰티 크림이라도 하나 더 살까?
아니다.
뭔 이드라 뷰티까지.
`한 번의 세상 체험이 괜한 짓을 했나?`
`아냐 한 번쯤 경험도 괜찮아`
회의파와 자위파가 잠시 상충했지만 결국 `잘했어`가 이겼다.
그것의 효과는 20대 청춘으로 회춘을 시도하진 않는다.
나를 달래주고 싶은 막연한 연민이다.
여자와 美(미)는 떼려야 뗄 수 없다.
90세 할머니도 외출할 때는 고랑 고랑 밭고랑을 가꾸신다.
이미 논과 밭이 구획 지어진 얼굴에 파운데이션이라는 씨를 파종한다.
이런 할머니의 생각이 그녀에게 슬그머니 동기를 부여해 준 것이다.
생전 가보지도 않은 곳으로 발걸음을 돌린 용기도 그 줄기다.
더듬거리며 찾아간 무슨 클리닉은 잠시의 활기를 그녀에게 퍼내주었다.
가버린 시간들은 주워모을 수 없다.
이런 행위는 잠시의 어깃장이다.
어깃장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의술의 힘을 빌려서 우중충한 기분을 세탁하고 싶다.
그래야만 다가오는 시간들을 정답게 마주할 것만 같다.
꼭 그럴 것만 같다.
그녀의 심정은 지금 그렇다.
아줌마 탐구하기 시리즈가 끝나면 아저씨 시리즈가 개봉될 예정입니다.
아저씨들도 기대하세요.
제 구독자분들 중에 남자분들도 많습니다.
제가 여자라서 남자세계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름 정리해서 올리겠으니
기다려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