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왕관
아저씨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이 징글벨 방글벨 울린다.
`뭐라고 뭐라고.`
둘이 대화를 주고받더니 아저씨는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밥을 퍼놓고 막 앉으려던 참에.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고봉밥을 퍼놓고 고봉으로 얘길 하고 싶던 참에.
전화 한 통화로 단박에 솔로가 되었다.
밥상에 홀로 앉아 반찬 속에 고독을 쑤셔 넣는다.
한쪽에 얌전한 고봉밥도 고독하긴 마찬가지다.
식어가는 고봉밥이 아깝기 그지없다.
애꿎은 된장국만 파장이 깊다.
상대방이야 밥을 먹으려는지 떡을 먹으려는지 상황을 모르지만,
이 찰나의 시간을 번개처럼 끼어들어 황홀한 밥상을 파투낸 것이다.
그렇다고 기껏 해놓은 밥을 무시하고 나가버리다니.
밥을 먹는다고 해서 양껏 더 하면 방금처럼 그런 사태가 벌어지기 일쑤다.
집에 오다가도 다른 길로 샐 때가 허다하다.
깨진 쪽박처럼 물길은 갈래갈래 샌다.
그럼 그 찬밥은 누구 몫일까.
밥이 남든지 말든지 매번 따끈한 밥은 아저씨 차례다.
마누라는 툭하면 찬밥 신세다.
아저씨는 이런 쓰린 속내를 알지 못한다.
사회생활은 남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저씨의 사회활동은 곧 캐시카우(cash cow)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든 싫든 그들을 우군으로 만들어야 내가 유리한 고지에 선다.
몸에 좋지 않은 술도 어쩔 수 없이 마셔야만 하는 상황도 종종 있다.
술에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오면 "이구우 술 좀 조금씩만 마시지."
잔소리 총을 빵 쏸다.
그러면 "우리 마누라 먹여 살리느라 그렇지 내가 술이 좋아서 마시는 줄 알아?"
이 말, 이 말이 감추고 있는 함축성.
이건 굉장히 무거운 거다.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수단이란다.
아저씨들의 고뇌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이 이 술이다.
술잔 앞에 앉으면 뭉쳤던 감정들이 술기운을 빌려 술술 풀려버린다.
그래서 음료 이름이 `술`이다.
몽롱한 기분은 맑은 정신으로 하기 힘든 말에게 용기를 준다.
마치 술이 모든 말실수를 책임져줄 것처럼.
하지 않으려던 말까지 득득 긁어서 퍼내는 것도 다 술의 힘이다.
친구, 사업 파트너, 직장동료는 아저씨들에게 있어 일시적이나마
마누라보다 우위에 선다.
그들에게 인심을 잃으면 인생이 반토막 나는 거라고 믿는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삶은 죽은 목숨으로 치부한다.
그래서 고봉밥 앞에서도 여지없이 이탈을 꿈꾼다.
아저씨의 이탈 행보는 어쩌면 고구마 줄기처럼 삶과 연결되어 있다.
위장 속에서 들끓고 있는 알코올들의 반란을 무시하며 센 척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직장 생활하는 아저씨들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저 꼴도 보기 싫은 상사에게 호기롭게 사표를 던지고 싶다.
네까짓 거 필요 없다고 땅땅 큰소리를 치고 싶다.
아저씨 마음속에 고이 접혀진 사직서는 아저씨 마음을 날마다 널뛰게 한다.
밉지만 그 사람 앞에선 웃는 낯의 페르소나를 집어들 수밖에 없는 처지를 비관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거래처 직원에게 고개를 조아리게 되는 또 다른 아저씨도 있다.
그들도 싫은 표정을 뒤로 감추고 색다른 가면을 얼굴에 건다.
생각 같아선 `너네 아니라도 먹고사는데 지장 없으니까 관둬.` 이러고 싶다.
속마음과 겉마음이 겉도는 상황에서 마음속 가마솥엔 애간장만 자작거리고 있다.
다 팽개쳐버리고 싶은 이 치사하고 자존심 상하는 행위들.
이것은 가정이란 울타리에 여지없이 걸려버리고 만다.
내가 참아야지.
토끼도 여우도 아저씨가 무너지면 함께 와장창 무너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아저씨는 무섭게 통감한다.
그 마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아저씨는 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종합병원에 실려온 아저씨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검다.
술에 찌든 간.
그것은 가정이라는 간판을 지켜내기 위한 아저씨의 몸부림이었다.
아저씨!
지나가다 발부리에 걸리적거리는 돌멩이라도 확 걷어차고 싶은 날.
그런 날엔 왠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진다.
잠시 초라함을 돌아보는 것조차 아저씨에겐 사치다.
그때 또 술이 생각난다.
아저씨가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면 그 길로 집으로 직행이다.
그렇지 않고 그대로는 집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일 때가 있다.
2~3차 술자리가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다.
마시면 마실수록 다리와 혀는 동족이다.
끝내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귀갓길을 서두른다.
대리운전기사의 뒤통수에 꽂히는 꼬부라진 발음은 허공에서 맴돈다.
"어디라고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연남도 옹, 아니 연무 도 옹."
"연남동은 서울이고 연무동은 수원인데 어디라고요?"
"에잇, 당신 맘대로 아무 데나 가."
대리기사 아저씨는 이미 구겨져있는 취객을 돌아보며 난감 모드를 켠다.
`저 냥반 어디로 가라는 거야 도대체.`
대리기사 아저씨는 취객으로 인해 직업이 생겼다.
취객을 상대하려니 대리기사 아저씨의 고통도 만만치 않다.
손님들은 아무 때나 "야."라는 반말로 기사 아저씨의 산등성이를 허물어버린다.
아줌마들도 안다.
아저씨들이 집으로 오는 길이 험난하단걸.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밥그릇에 따끈한 고봉밥을 퍼놓고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다.
새 밥은 아저씨 밥, 헌 밥은 아줌마 밥으로 슬쩍 바꿔치기해 놓고 시치미를 떼면서.
세상 아저씨들 모두가 가장의 왕관을 쓰고 그 무게를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걸 아줌마는 안다.
그리하여 콩 한쪽이라도 아저씨 고봉밥 위에 고명을 얹는다.
그래서 오늘은 아저씨 모두에게 기꺼이 엄지손을 치켜들고 싶다.
아저씨! thumb up.
아저씨! 만만세.
아저씨 탐구하기.
벌써 10회를 맞았습니다.
아줌마 탐구하기를 끝내고 아저씨 탐구하기로 이어진 아저씨 얘기.
어떠셨는지요?
이 시리즈를 통해 아저씨들이 또는 아저씨의 반쪽인 아줌마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아줌마 보다 아저씨 얘길 쓰기가 훨씬 힘들었습니다.
남자가 아닌 사람이 남자 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말이죠.
이번 아저씨 탐구하기도 10회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님들, 작가님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