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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미 선 Jun 12. 2024

인생 그게 뭐라니?(8)

아이스 께끼

"아이스~께~끼."

"아이스  께~에끼."

`오! 왔다 왔어.`


"엄마 아이스 께끼 하나만  사줘"

"저 노무 기집애는 맨날 아이스 께끼 타령이야."

내겐 아이스 께끼가 고문이고 엄마는 졸라대는 내가 고문이었다.


"칫, 이담에 커서 아이스 께끼 장사한테 시집가야지."

네모 반듯한 박스를 어깨에  메고 "아이스 께끼"를 외치는 장사꾼이 근사해 보였다.

저런 사람과 살면 아이스께끼는 실컷 먹겠지. 

 

그런데 이 눔의 세월은 왜 그리 더딘 것이냐. 

뻥튀기는 뻥 소리만 나면 세 배 네 배로 커지는데 나는 어쩌자고 이리 크질 않는 거냐고.

저러다 아이스 께끼 장사들 다 할아버지 되는 거 아니냐.

한 여름의 폭염은 더더욱 아이스께끼를 죽도록 짝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가 선심 쓰듯 아이스 께끼 아저씨를 불러 세웠다.

"너 이것만 먹고 다음부턴 사달라지 마."

다짐이고 약속이었다.


다짐도 약속도 싫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임시방편 고갯짓은 당연 힘이 없었다.

지금의 비비빅처럼 땡땡 언 얼음과자를 내 손에 쥐고 나는 생각했다.

아이스 께끼 하나면 끝인데 이걸 이젠 안 사주겠다니 우리 엄마는 아무래도 계모인가 봐.


알록달록 지지미 치마를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폼나는 가죽구두를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사달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건만 나를 붙들고 다짐을 했다.

기껏 아이스 께끼 하날 사주면서 다신 사달라고 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어린 마음에 서러웠다.

엄마는 세상 모든 것들을 다 해결해 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만 같았던  엄마가 께끼 하나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 께끼를  차마 깨물어 먹지도 못하고 살금살금 아껴 먹었다.  

차라리 깨물어 먹었다면 아깝지나 않을 것을.

더운 날씨에 녹아버린 것이 절반이다.

자꾸만 닳는 것이 아까웠다. 

아이스 께끼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마음도 쪼그라들었다.


딱딱했던 아이스 께끼는 어디로 가고 손잡이만 남았다.

그것조차 쉽게 버리지 못했다. 

아이스 께끼 막대를 어디다 꽂아놓고 기념하고 싶었다. 


나는 여름이 다 가도록  아이스 께끼 아저씨를 흠모했다.

그가 짊어지고 가는 박스 안의 아이스 께끼는 그때부터 아저씨와 함께 할 

먼 미래 나의 운명이었다. 


아이스 께끼는 일본식 발음으로 원래는 ice cake이다.

한국, 얼음과자 사시오? 

일본, 아이스 캔디 사시오?


결국 케이크, 케키, 께끼로 변질되어 아이스 께끼로 안착했다.

케이크이든 께끼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것을 맨날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했다. 


앞날의 희망이었던 아저씨는 어느 날 거리에서 사라졌다.

자동으로  아이스 께끼도 멀어져 갔다. 

아이스 께끼 아저씨 마누라가 되겠다던 꿈도 복날의 아이스 께끼처럼 녹아버렸다.


그때의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소원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아이스 께끼에 앞날까지 담보되어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스 께끼"를 외치던 장사꾼은 지금 살아있을까?

그들이 살아있다면 그 시절 풍경을 한 자락 꺼내줬으면 좋겠다.

"아이스 께끼" 

"아이스 께끼"


아이스 께끼 장사는 장사대로 속이 탔다.

어느 날은 도무지 아이스 께끼가 팔리지 않았다.

그득 찬 께끼가 팔리진 않고 무겁고 지친 어깨를 쉬어갈 곳은 느티나무뿐이었다. 

매일 북적대던 느티나무도  누군가 초상이 나거나 결혼식이 있으면 한가해진다.


비 오는 날도 쉬는 날.

애경사도 쉬는 날.

덜 더운 날도 쉬는 날.

이래저래 생계가 쉽지 않다.


사주고는 싶은데 돈이 없어 속이 타는 엄마,

먹고는 싶은데 먹을 수 없어 안달하는 나, 

장사가 안되어 가슴이 아픈 삼중고가  아이스 께끼에 얹혔다.


예나 지금이나 장사하는 이들은 장사가 잘 되어야 신이 난다.

무거운 아이스 박스가 가벼워야 신바람이 난다. 

다 팔고 돌아가는 날은 발걸음이 쿵작 쿵작했겠지만,

께끼가 가득한  날은 발바닥이 쇠뭉치를 매단 듯 둔탁했으리라. 


고픈 배를 움켜쥐고 또 하루를 견뎌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더운 날 아이스 께끼를 맘대로 먹을 수 없다는 것이 그토록 슬픈 일인지.

팔리지 않는 께끼를 어찌할 것인지.

배고픈 추억이 없는 이들에겐  이런 상황들이 그저 추상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추상작가 앞에 서서 그림을 이해하려 해도 아리송할 때가 많다.

도무지 무엇을 표현한 건지,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추상화를 그린 깊은 뜻이 분명 숨어있음에도 그것의 깊이를 파 낼 수 없다. 

그림은 설명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배고픈 추상화를 어떻게 정물화로 바꿀 것인가.


쌀독에 쌀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 쌀이 다 떨어지면 어쩌나! 

날마다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엄마였다.

엄마의 타들어가는 마음과 막내딸의 떼는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였다.


아이스 께끼를 사주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하던 엄마의 야속함은 

철이 들어서야 씻어낼 수 있었다.

쓰린 자국도 철이 들어가면서 차츰 메꿔져 갔다. 

그깐것이 뭐라고 엄마를 괴롭히고 나를 들볶았는지.


아이스 께끼가 그림의 떡이 되자  대신 땅풀을 뜯어먹었다.

밑동이 하얗고 통통한  땅풀은 달척지근했다.

하루종일 질겅거려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꼬륵, 꼬륵 꼬르륵.

정확한 생체시계는 속일 수 없다.

누가 뭐래도 계산이 정확했다.

밥 들일시간이다. 

밥 들여보내. 


그저 눈만 뜨면 배가 고팠고  눈 감아도 배가 고픈 어린 시절은 가혹한 삶의 현장이었다. 

아이스 께끼 하나만 제대로 먹어도 그날은 봉황 잡은 날이다.

더구나 음식은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맛있고 다양한 아이스크림이 넘쳐난다.

이런 세상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아이스 께끼 장사와 결혼하지 않기 잘했다.

그러지 않아도 얼마든지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시대인가 말이다.


꼬마가 보고 겪은 개인사는 한 나라의 역사이다.

굴곡의 역사다.

역사를 엮어온 그 시대 사람들 모두는 공공의 財貨(재화)다.

어둠 속에서 캐낸 오늘은 그들이 견디며 끌고 온 고통의 덩어리들이다.





완료와 발행에 잠시 헷갈렸어요.

정확하게 9시에 발행을 눌러야 하는데 손가락이 앞장섰군요. 

48분 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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