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다 돌아온 사람
나는 경기도 수원이 고향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사를 가지 않고 그 터에서 살았다.
결혼을 하면서 그때서야 그 집을 떠났다.
그 집은 뼈를 굵게 만들고 살을 보태며 성장하던 뿌리였다.
부모님은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사시다가 수원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하셨다.
아버지는 신문기자를 하셨고 엄마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림만 하는 아줌마였다.
시대가 그랬듯이 집안은 너무 가난했고, 청렴하다 못해 순수하기만 하던 아버지는
매번 4남매의 배를 불룩하게 해주지 못했다.
게다가 엄마는 시난고난 아픈 병자였다.
위가 아픈가 하면 간이 좋지 않아 결국 간경화라는 병으로 세상을 떴다.
잦은 병치레는 병원비를 많이 축내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 집에서 부부싸움이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엄마가 뭐라고 싫은 소리를 해도 아버지는 항상 웃는 낯으로 엄마를 대했다.
오죽하면 흑석동 이모는 매번 사 남매의 뇌에 칩을 박아두었다.
"너네 아버지는 신문에 날 사람이야."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했어도 아버지는 신문에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신문기자 직분을 가지고 있었어도 신문에 까진 기사화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정말 법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여자인 엄마보다 피부가 더 곱고 곱상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자식으로서 자부한다.
매번 우리 사 남매가 모여 수군거린 레퍼토리는 똑같다.
"우리 아버진 바본가 봐 바보."
남들에게 생전 싫은 소릴 한마디도 못하고 엄마에게는 진정 부드러운 남자였다.
오히려 여자인 엄마가 큰 소릴 쳤으면 쳤지 아버지는 되받아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선지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좋았다.
엄마는 지식인이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지식인이었다.
엄마는 소리를 지르고 "이 년 저 년."욕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생애에서 아버지가 상소리를 하거나 화를 내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무식한 엄마와 사는 아버지가 늘 손해 보고 산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계모 아님)
아버지는 항상 무르팍에 막내인 나를 앉혀놓고 이런저런 세상사를 이야기해 주셨다.
그 시간이 평생 가장 달콤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버지의 세상사 강의는 내가 글을 쓰는데 초석이 되었을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어린아이가 뭘 알겠냐만 알든 모르든 잠재의식 속에 나를 성장시킨 자양분이었다.
이렇게 이래저래 좋은 아버지가 또 나를 살렸다.
그러니 나는 아버지가 父이기 이전에 은인이었다.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대개 아이들은 아버지보다 엄마를 좋아하기 일쑤인데 나는 그렇지 않다.
이런 생각은 엄마에겐 늘 서운함으로 작용했을 거다.
그렇다고 절대 엄마가 싫다는 건 아니다.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늘 내 마음 중심에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8개월 만에 생을 마감할 뻔했다.
잠시였지만 마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도 안된 영아가 심한 감기에 걸리면서 폐렴이 찾아왔다.
쌕쌕거리는 숨을 겨우 몰아쉬다가 그 마저도 중단되었다.
아기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이리 뒤척 저리 뒤척여봐도 반응이 없었다.
맥도 끊기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엄마는 내가 죽었다고 통곡을 하셨고, 아버지는 급한 대로 남문으로
정신없이 뛰셨다고 한다.
거기엔 작은 약방이 하나 있었다.
혼비백산으로 뛰어가서 아기의 상태를 설명하고 약을 좀 지어달라고 했다.
애절한 눈빛으로 간구했을 아버지의 언행은 약사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약을 먹는다고 해서 100% 아기가 낫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일단 먹여보라고 했을 터다.
미동도 않는 아기에게 약을 먹이고 결과를 지켜보는데 여전히 아기는 반응이 없었다.
동네 아저씨 들은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고 저마다 삽을 들고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빨리 뒷산으로 묻으러 가자고 서둘렀다.
아버지는 낼 까지 지켜보다가 안 되면 할 수 없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완강하게 버티셨다.
밤새 곁에서 지켜보며 이튿날 묻으러 가야 할 어린 생명을 생각하니 가슴에 돌무덤이 얹혔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기를 들여다보는데 세상에.
새벽.
아기의 입에서 거품이 몽글몽글 새어 나오더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기적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 딱 맞는 말이었다.
"움직인다. 움직여."
아버지는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하셨다.
터진 눈물은 그침을 몰랐다.
이튿날 또 삽을 들고 나타난 아저씨들은 아기가 다시 움직인다는 것에 반신반의했다.
아기의 숨소리를 확인하면서 집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작은 동네는 죽었던 아기의 기적으로 연실 복닥거렸다.
이 소식은 온 동네 소문으로 퍼졌고 나는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이다.
훗날 커가면서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쟤가 죽었던 애 아니야?"
"오! 맞아 죽었던 애야."
나는 동네사람들에게 신기함과 호기심의 죽었던 아이였다.
어떻게 생사의 기로에서 생으로 돌아섰는지 도무지 아는 사람이 없다.
아버지도 엄마도 모른다.
약의 효험인지 신의 계시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간절함이었던지.
결론은 아버지의 고집이었다.
아버지가 버티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땅속으로 처박힐 신세였다.
무엇이 급하냐고.
기다려 봐야 한다고.
그 고집은 한 사람을 살려냈다.
그때 아버지의 심정을 훗날 커가면서 듣고 또 수없이 들었다.
생명을 지켜준 아버지께 늘 감사했다.
아버지가 40대에 얻은 늦둥이 딸로 태어난 나는 이렇게 다시 세상을 얻었다.
살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고집은 바로 나의 동아줄이었다.
이렇듯 질긴 생명으로 다시금 생을 이어가는 데는 그 사람만의 수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본다.
몇 살까지 살고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사람만의 지도는 분명히 그려져 있다.
그것은 오컬트다.
나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신비한 비밀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로 갈 것인지 정해야 했지만, 그건 내가 정할 길이 아니었다.
어린 생명은 그때의 상황을 전혀 모른 체 죽든지 살든지 기로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어른이었다면 임사체험이라는 명목으로 글을 쓸 수도 있었다.
잠시 죽음의 세계는 어떤 것이었는지 그게 지금도 궁금하다.
과학이 풀어내지 못한 신기한 생과 사의 저편과 이편은 어떤 그림이었을까.
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비밀의 화원에서 깨어나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내 운명은 지금까지 이렇게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은 너무도 못살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어른이 죽으면 제대로 장례를 치렀지만 아이가 죽으면 그냥 뒷산에 묻으면 그만이었다.
봉분도 없고 표지석도 없이 쓸쓸하게 사그라들 잡초더미였다.
앞집의 순이가 그랬고 내 바로 아랫동생이 그랬다.
열악한 환경과 의료시설의 부재는 까딱하면 생명이 사그라드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
내겐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짧다.
해저문 소양강에 지는 석양처럼 언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보다 확실한 건 없다.
죽음이라는 명제가.
엄마도 아버지도 언니들도 다 하늘나라에 터를 잡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살아갈 동안 나는 나를 낳아준 부모님께 하늘나라에서라도 부끄럽지 않게 행동할 것을 다짐한다.
어린 생명을 다시 환생시킨 아버지의 바람은 하나다.
이 땅에 태어났으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라는 묵언 바로 그거였다.
앞으로 남은 생은 그림과 글을 좀 더 심화시켜 나갈 것이다.
남은 생까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행하여 역량껏 나를 채우려고 한다.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삶엔 가격 레벨이 붙어있지 않다고."
그렇다.
내 삶엔 내 맘대로 가격을 붙이면 되는 거다.
나란 상품을 플리마켓에 내놓을지 백화점에 진열할지 그건 내 하기 나름이다.
나는 정성껏 만든 수제품이 될 수도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물건이 될 수도 있다.
죽고 사는 문제는 내 관할이 아니지만 나를 올리고 내리고는 내 소관이다.
아무쪼록 한 생명의 연장은 선순환을 이루어야 한다.
이 땅에 쓸모없이 살다 간 무명초 보다 유명하진 않아도 내 몫을 제대로 하고
돌아가는 것이 내 남은 삶의 목표다.
유년시절 모습을 상상만으로 그린 캐리커처. 스케치북, 붓펜, 파스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