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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미 선 May 15. 2024

인생 그게 뭐라니?(4)

두 번째 죽을 고비


아!

고구마.

유년의 마당에서 그토록  나를 전율케 하던 그것. 

그것이 대체 무엇이었기에 이토록 나를  질기게 쫓고 있는가.


요즘같이 먹거리 많은 세상에 고구마는 이제 고급음식의 반열에 들지도 못한다.

고급음식은 아니더라도 추억의 구황작물로 꼽사리를 낄 순 있다.

고구마가 아직 이 땅에서 존재를 밝히고 있는 이유는 웰빙식이라는 것일 테다.


내 어린 시절은 온 동네가 논이고 밭이었다.

별다른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은 시대에 농작물은 중요한 식량자원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고만고만한 땅뙈기에 농사를 짓고 넉넉하진 않았지만 평화롭게 살았다. 


우리 동네엔  400년이 넘는 늙은  고목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한 그루는  동네 한쪽에 치우쳐 있었고, 다른 한 그루는  내 집과 가까이 있었다. 

늙은 느티나무는  온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요, 모임장소요, 소문의 근원지였다.

항상 그곳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아이들에겐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나무 바로 아래는 공동우물도 자리하고 있었다.

아줌마들은 그곳에서 빨래 방망이를 두들기며 속풀이를 했다.

수다가 푸짐했던 아줌마들의 화풀이 장소요, 뉴스가 생성되던 샘터였다.

느티나무와 공동우물은 동네의 공동의식을  고양시키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곳은 겨울에만 나무 밑에 사람들이 없었다. 

여름이면 농사일에 힘들었던 동네 사람들이 대자로 누워서 매미소리 장단 삼아 

코를 골던 향수 어린 터전이었다.


이렇게 평화롭던 동네에 하루 몹시도 소란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때는 강다리가 피어나는 봄날, 4월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그날도  느티나무 아래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때 동네 영옥이란  친구가  내게 다가왔다.


"미선아 고구마 줄게 넌 칼을 가져와."

고구마를 준다는 말에 어린 마음은  금세 흔들렸다.

내게 그것은  알천이었다. 

곧바로 칼을 가지러 뒤뚱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가 다섯 살.(엄마, 아빠 언니들의 증언.)


지금은 다섯 살이면 영악한 꼬마지만 그때 다섯 살은 어리숙하고 순진무구한 아기였다.

겨우 말귀나 알아듣고 걸음걸이가 조금은 안정되었을 다섯 살 배기의 희망은 진정으로  

고무풍선처럼 부풀었다.

허술한 집 부엌 한 편.

거기 놓인 커다란 무쇠 식칼은  고구마를 얻어먹을 수 있는  욕망의 근거였다. 


훅 불어버리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체구였지만 무쇠 식칼의 무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꼬마에겐  고구마를 얻어먹을  수 있겠다는 열망만이 있을 뿐이다. 

고구마, 고구마, 고구마.


그때는 산업화가 일어나기 직전이라 누구나 농사를 짓던 시절이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서울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밭뙈기 하나가 없었다.

박봉에 시달리며 시난고난 사는 게 힘든 시기였다. 


농산물 같은 알짜배기 실속이 없었다.

밭을 산건 그 한참 뒤의 일이라서 농산물은 주로 사 먹거나 얻어먹었다. 

남들은 흔해터진 푸성귀가 우리에겐 귀했다. 


그 흔하던 고구마마저도 인심 좋은 동네 사람들이 갖다 주면서 얻어먹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고구마를 준다고 하던 영옥이네는 아버지가  수원 교도소 교도관이었다.

선대로 이어진 널찍널찍 한 땅이 있어서 먹는 것에 있어선 그나마 풍족한 집안이었다.


영옥이는 늘 뭔가를 가지고 나와서  먹곤 했다.

턱밑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꼴깍꼴깍 침을 삼키는 내 모습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제 기분에 따라서 손가락만큼 떼어주기도 하고 그것마저 주지 않고 팽 돌아서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제 스스로 찾아와서  고구마를 줄 테니 칼을 가져오라는 얘기를 했다.

자기네 집도 칼은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나에게 칼을 가져오라고 한 건지 그건  모르겠다.

아마도 고구마를 얻어먹는 대신 도구라도 가져오라는 우월의식이 아니었는지.


우월의식이든 오월의식이든 고구마를 준다는 건 내겐 좋은 의미였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칼보다 더 무거운 것을 가져오라고 해도 끌고 갈 마음의 채비가 되어 있었다. 


칼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앙큼 앙큼 걸어서 영옥이네 대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대문은 커다란 장애물로  버티고 있었다.

당시 허술한 집들이야 대문이랄 것도 없었지만 집 형태를 제대로 갖춘 가옥들은

대문들이 웅장했다.


주로 목재로 대문을 만들었다. 

두 짝이 여닫이로 안쪽에서는 빗장을 걸어 잠그는 기능까지 있었다. 

두 개의 대문짝에  가로로 육중한 문지방을 하나로 연결한 구조가 그 시절 대문의 형태였다. 

가로로 된  문지방은 출입에 적잖은 방해가 되었다. 


영옥이네 소 외양간은 대문 오른쪽에 있었다.

들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던 황소가  힘겹게 문지방을 넘어가던 것을 기억한다. 

황소도 넘기 힘든 아름드리 통나무 문지방은 다리가 짧은 어린 아기가 드나들기엔 참으로 

큰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알았지만 영옥이는 소 외양간  틈새로 통과)


이거야말로 야단 났다.

고구마를 얻어먹어야 되는 절체절명의 기회 앞에서 아름드리 문지방이라니.

그 짧은 생애 중에서  최대의 고민거리로 부상했을 터다.

그 순간이.


나는 내내 대문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불쑥 치솟는 용기로 포기할 수 없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국 원통 문지방을 타기로 결심한 것이다. 

겨우 원통의 절반쯤 올라탔을 무렵,

칼을 움켜쥔 오른쪽 팔이 기우뚱 기울면서  꼬마는  땅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문지방 위에서도 칼을 놓치지 않으려는  어설픈 몸짓이 낙하를 재촉한 것이다.


떨어지면서 무쇠 식칼의 예리한 칼날이 꽃잎처럼 여린 입술을 파고들었다.

즉시 선혈이 한 여름 소나기처럼  땅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괴성 같은 울음소리가 동네의 고요한 정적을 깨고 너울너울 흘러갔다.


느티나무 아래 공동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엄마는 누군가가 전해준 이 놀라운 소식에 

죽을 듯이 내달렸다.

공동우물에서 멀지 않은 위치였다.

이미 어린 입술에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피가 꾸역꾸역  쏟아져 나와 땅바닥이 질펀해질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난리가 났다.


엄마는 나를 안고 공동우물로 뛰어가  끊임없이 솟구치는 피를 닦아냈다.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발버둥을 쳤다.

노란 양은 대야에서 빨간 물감처럼 번져가던  핏물을 버리고 또 버리고.

같은 동작은 대책 없이 반복되었다.


우선 지혈이 선행되어야 했다.

물에 닦아내는 것은 응급조치와는 정반대였다. 

엄마는 당황한 나머지 우선 흐르는 피를 닦아내기만 했을 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응급조치를 해볼 만한 어떠한 도구나 약조차 없던 상황에서 지혈의 어려움에 봉착했다.

결국 엄마의 눈에서도 애간장의 굵은 눈물이  선홍색 피와 섞여  대야 속을 맴맴 돌았다. 

내는 엄마의 치맛자락이 지혈제로 변하여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졌다. 


기막힌 모녀를 지켜보던 영자 엄마가 그제야 생각난 듯  뛰어가 들고 나온 허연 가루,

그것은 갑오징어 뼛가루였다.

아이들이 다치거나 피가 날 때 쓰려고 갖춰둔 상비약이었다.


그 가루를 입술에 뿌리고 엄마의 치마로 누르고를 반복하다 보니  그제야 슬슬 

피가 멎게 되었다.

나는 기진맥진하여 축 쳐졌고 동네사람들은 또 한 번 나의 생사가 걱정되었다. 

돌도 안된 아기가 죽었다고 삽을 들고 나섰던  사람들이 저러다 쟤가 또 죽겠구나 싶더란다.


조금만  더 피가 멎지 않았다면 또다시 화를 면치못할 상황이었다.

피는 어렵게 지혈이 되었지만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덮어버렸다.

심하게 부어오른 입술로는  음식을 전혀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윗입술을  들어 올려 멀건 미음을  흘려 넣는 걸로 연명을 해야만 했다. 

살면서 흘려야 할 눈물을 몇 날 며칠 만에  미리 다 가불 해다 써버렸다.

엄마, 아버지, 두 언니, 오빠가  막내인 나를 업고 이리저리  허둥거렸다.  

상처로 인한 통증은 허둥거린다고 덜어질 문제가 아니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유채꽃 속살의 연하디 연한 줄기를 들이대도 울고,

눈만  뜨면 찾아가던  옆집 교순이네 강아지 `복순이` 를 데려다줘도 울고,

무동을 태어줬어도 울고,

풀꽃반지를  끼어줘도 울고, 

아버지가 등에 업고 둥둥둥 달래 봐도 울고.

동네 사람들까지  동원해서 좋아할 만한 것들을  다 들고 나와 달래줘도 울었단다.


생으로 찔린  입술이 아물기까지는 얼마나 큰 고통이 수반되었을까!

꾸덕꾸덕 아물어  겨우 밥을 먹게 될 쯤에야 눈물이 멎었다.

아팠던 본인이나 달래던 식구들이나 긴 고역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바람에 마르는 해산물처럼 그렇게 시간이 약이었다.


그 후로 입술 한가운데에 끔찍한 흔적이  남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입술 안쪽으로 흉터가 생겼다.

조금만 칼끝이 깊었더라면 나는 8개월에서 겨우 건져낸 목숨을 다섯 살에 

다시 마감할 뻔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내가 울 때마다 언니들은 나를 놀렸다

"미선아 너 울면 입에서 벌레 나와. 이거 봐 나오려고 한다."

이러면서 내 흉터를 짚었다. 

그러면 얼른 눈물을 그쳤던걸 생각하면 지금도 언니들이 야속하다. 


이렇듯 긴 세월 동안 내 아랫입술엔 고구마를 향한 희망가가 적혀있다.

어디서든 고구마를 사다 먹을 때마다 참을 수없는 유년의 서러움이 쿨렁대고 나타난다. 

입술 흉터는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서 궁핍한 시대적 배경을 증언하고 있다. 

푸근했고. 훈훈했고,  순수했던  그 시절.

아랫입술에 도톨거리는 상처만이 그날 거기 내가 서있던 자리로 남아있다.


상처를 여기까지 끌고 왔지만 고향은 여전히 그립다.

드디어  작년 이맘때 고향을 찾아갔다.

느티나무가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지.

예전에 살던 고향집은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건지.

사무치게 확인하고 싶었다.


드디어 고목나무와 만났다.

만났지만 나는 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나무는 예전의 그 늠름하던 고목나무가 아니었다.

하마터면 저 나무가 아니라고 지나칠 뻔했다.

나무 옆에 표지석이 없었더라면.


저 나무가 내 어린 시절 그토록 울창했던 고목이라고?

나무는 지나간 것들에 대한 허망함을 전신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오랜 세월  마을의 수호신이 되어주었던 노거수는  이젠 개선장군 같은 위용이라곤 온데간데없다.

500년이 임박한 힘없는 노목에 불과했다.


우린 그렇게  멀리 돌아 그제야 만날 수 있었다.

동네가 겪었던 일들은 모두 저 나무에 간직하고 있는 전설의 고향이자,

내 마음의 풍금인 고목이 그나마 죽지 않고 나를 맞아주었다.


모퉁이를 돌아 아득한 내 어린 시절을 보듬었던 옛날집이 보이자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고향은 그런 곳이고 어린 시절은 그토록 눈물겹다.

`차마 그곳이 꿈엔들 잊힐리야` 그 마음과 딱 맞아떨어졌다.

아팠던 추억도 고향은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반기고  토닥거려 주었다.



파스텔화. 고구마.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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