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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미 선 May 22. 2024

인생 그게 뭐라니?(5)

어린 시절은 참으로 행복했네

내 어린 시절은 누구나 못살았다.

앞 집도 그 앞 집도 다 누더기였다.

티셔츠도 꿰매 입고  바지도 꿰매 입었다. 

사는 게 다 고만고만했다.


특별히 잘 살던 집은 우리 바로 옆집 교순이네 뿐이었다. 

누굴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었고 부끄럽지도 않았다.

도토리 키재기의 부류들은 그래서 더 끈끈했고 친밀했다.


머리에는 서캐가  질서 정연하게 머리카락을 잠식했다. 

서캐가 성충이 된 이 놈들은 사방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옷 솔기에도 이가 쫀쫀히  숨어들었다.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머릿니는 보호색을 띤 검은색이고 몸에 기생하던 이는 희뿌연 색이었다. 

벽에 걸려있던 달력은 한 달이 지나면 북 뜯겨서 머릿니를 훑어내는 처형장이 되었다.

널찍하고 하얀 달력 뒷면은 머릿니를 식별하기 좋은 장소? 였다.

참빗으로 죽죽 긁어내면 새카만 이들이 사방으로 줄행랑을 쳤다.


엄마의 넓적한 엄지손톱은 이들의 단두대였다.

몸의 피를 빨아먹은 이 징그러운 곤충들이 새빨간 피를 토해내고 죽어갔다.

이것은 누구네 한 두 집만의 풍경이 아니었다.


영자네도 옥선이네도 금순이네도 다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를 타작하며 살았고 부스럼을 달고 살았다.

밤이면 몰래몰래 몸을 물어뜯어 북북 긁어대기 일쑤였고 피를 흘리기도 했다.


뚫어져 삐죽 나온 발가락은 무좀을 예방하는 통풍구였다.

불편하거나  창피하지도 않았다.

이가 물어뜯어도 배가 고파도  그 무엇이든 다 좋았다.

우리 4남매는 한 방에 누우면 꾀죄죄한 이불을 들썩거리며 계속 깔깔거렸다.


철이 없었는지 세상이 그랬는지  속상한 일이 없었다. 

가마솥 밥 위에 얹어 찐 밀가루 떡은 세상천지에 없는 명품 떡이고,

금방 쪄낸 감자는 미슐랭 맛집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그 무엇이든 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쳤다.


해마다 엄마는 가을이면 시루떡을 한 시루 쪄냈다.

엄마뿐 아니라 온 동네는 추수가 끝나면 꼭 시루떡을 했다.

연례행사인 떡 쪄 내는 날은 잔칫날이었다. 

우리 집은 농사를 짓지 않았음에도 그 행사를 멈추지 않았다.

떡 품앗이였다.


엄마는 방이며 부엌이며 장독대에도  떡을 갖다 놓고 조상님께 감사했다.

특히 조앙신이 머문다는 부엌에서는 더 길게 고개를 숙였다.

식량을 향한 간구는 깊숙이 숙여진 고개와 합쳐진 두 손에서 무게를 더했다.


감사가 끝난 후 널찍한 접시에 세 쪽의 큼직한 시루떡을 담아 동네로 돌려댔다.

엄마표 시루떡은 두툼했다.

매번 변함없이 남들의 두 배 정도 두꺼웠다. 


시루떡이라고 다 같은 떡이 아니었다.

어떤 집은 호박고지를 넣었고 어떤 집은 얇은 수수떡을 만들기도 했다.

콩을 넣거나 무를 넣기도 했다.

그런데 엄마가 만든 떡은 늘 두툼했고 팥의 양이 푸짐했다.


떡을 돌리는 일은 언제나 막내인 내 몫이었다. 

신문지를 덮어 헐떡거리고 이 집 저 집으로 떡을 돌렸다.

돌리고 와서도 누구네는 갔었는지 아직 안 갔는지 점검을 했던 기억이 난다.

떡을 받은 아줌마들은 함지박 같은 웃음으로 감사했다.

"엄마한테 잘 먹겠다고 전해."

"네."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돌아서던 내 유년은 그렇게 행복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못 살던 시대의 푸짐한 인심과 풍성한 웃음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원천이 어디에 있었던가!


바로 그거다.

누구와 비교되지 않고 평등했던 삶.

누굴 시기하지 않고 푸근했던 마음 가짐. 

옥수수 하날 물고 하늘의 별을 세다 잠이 들던 멍석위의 그 삶이 진정 달콤했다. 


배고팠지만 누군들 부럽지 않았고 남루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흙장난은 변변한 장난감보다 재밌었다.

손등은 가뭄의 논바닥처럼 갈라졌지만 갈라진 틈을 메울 새도 없이 또다시 흙으로 뒤덮였다. 


끊임없이 땅풀들을 뜯어 반찬거리를 만들어 냈고 찰흙으로 송편을 빚어 한상을 차렸다. 

소꿉놀이를 통해 천연덕스럽게 어른 흉내를 냈다. 

"여보 이것 좀 먹어보소."

`짭짭짭.` 

`냠냠냠.`

내 어린 남편은 옆집 부잣집 도련님  동갑내기 교철이었다.


어린 부부도  권태를 느낄 때가 있었는지 가짜로 먹다 남은 찰흙 송편을 들고 

느티나무 밑으로 팔러 나가기도 했다.

"자 여기 송편이 왔어요. 송편."


아줌마들은 이 꼬마를 향해 깔깔깔 파안대소를 하며 지나갔다. 

"쟤는 커서 뭐가 되려고 저래."

칭찬인지 핀잔인지 그것까지 구분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예닐곱 어린 유아였기 때문이다.


특히 봄이면 앞 뜨락에 울울창창 피어나던 해당화 잎이 꼬마의 천연 립스틱이었다.

그 향기롭고 보드라운 질감의 꽃잎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품위 그 자체였다.

꽃잎에 침을 발라  붙이고 송편 장사를 할라치면, 

어른들에겐 이보다 더 우습고 재밌는 코미디가 없었다. 


"송편이 얼마니?"

사지도 않을 거면서 해당화 꽃잎을 붙이고 서성거리는 꼬마가 어른들은 신통방통 했다.

어린 장사꾼은  고달프지 않았지만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은 고단한 일상이었다.


농사일을 하러 가는 길이기도 했고 끝내고 오는 길이기도 했을 터.

고단한 일상에 꼬마는  한줄기 웃음을 선사해 주었다. 

돈을 내고 사고파는 일은 없었지만 내 난전 앞을 지나던 사람들은 늘 싱글벙글이었다.


저녁이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허연 연기가 밥 짓는 신호를 보냈다.

엄마들은 저마다 아이들을 불러들여 저녁밥을 먹였다.

그때 부르던 엄마의 그 목소리는 천상의 목소리였다.


반찬이래야 온톤 푸성귀 일색이었고  밥이래야 쌀보다 보리가 절대우위였던 

저녁밥은 지금의 고급 레스토랑 보다 더 맛있었다.

하루종일 뛰놀다가  빈속에 들어차던  포만감은 세상의 모든 행복을 걷어다 주었다.  


여름에는 원산너머라는 고개를 넘으면 참외, 수박 밭이 질펀하게 퍼져 있었다.

그곳에서 앞집은 주로 참외 농사를 지었다.

참외밭은 항상 한쪽 눈이 찌긋한 할머니가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서 있던 원두막이 그렇게나 좋았다. 


원두막은 망을 보는 곳이라서 높았다.

어떤 놈이 참외 서리를 해가나 지키는 보초막이었던  원두막.

원두막은 어린아이에겐 최대 선망의 장소였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얼기설기 짜 맞춘 판자때기가 원두막의 원형이었다.


그 시원하고 전망 좋은 원두막에서 얻어먹는 참외는 정말로 기똥차게 맛있었다.

잘 익은 노란 참외가 던져주던 시각적인 유혹은 원두막과 함께 내 생애 갈피에 지금도 접혀있다.

그때 맛보던 참외 맛은 평생 기호식품으로 연결되었다.


참외는 아이들이 아무 데나 싸질러 놓은 변에서도 싹을 틔웠다.

참외는 나날이 넝쿨이 번져나갔고 드디어 호두만 한 연두색 뭉치가 열렸다.

풍선처럼 길쭉하게 늘어나던 참외는 어느 날 찬란한 황금빛으로 생을 완성했다. 

와! 이것처럼 신기할수가.

똥참외면 어떻고 금 참외면 어떠랴.


황금색 빛깔이 주는 상품성은 그것이 변에서 태생한 참외라는 것을 몽땅 앗아갔다. 

진정으로 맛깔난 신세계를 탐험하는 순간이다.

4000년 전 크레타섬(그리스 지중해 섬) 크노소스의 주민들도 배설물을 재활용했다.

내 어린 시절의 농법도 인분을 거름으로 쓰면서 찬란하게 발전해 갔다.

태생이야 어찌 됐든 완결이 중요했다.


그 시절은 가난을 싹 잊어버릴 만큼 정서적으로 안정되었고 재미있었고  활기로웠다. 

이런 세상은 다신 맞이하지 못할 낙원이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지만 빈곤했던 자리엔 지금 누리지 못할 행복이 

퐁당퐁당 빠져 있었다.




행복.  유화 캔버스 20 40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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