姑婦(고부) 그게 뭔데요?(8화)

두 개의 안테나

by 김 미 선

고민이 생겼다.

뭔 고민?

아들은 우리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산다.

그리 멀지 않다 보니 집엘 자주 온다.


우리는 걔네들 집에 거의 가지 않는다.

엄마, 아빠 한 번 오세요. 손짓을 해야 겨우 간다.

집에 자주 오다 보니 끼니때를 맞을 때가 많다.

외식을 할 때도 있지만 내 성향이 집밥을 더 좋아한다.


밥을 먹고 나면 당연히 설거지가 쌓인다.

옛날이야 며느리가 설거지를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쩌다 할 수 도 있다가 되었다.

크게 차린 건 없지만 먹은 양에 비해 설거지는 항상 수북하다.


아들은 애초부터 나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마누라가 설거지 담당자가 될까 봐 서둘렀다.

"엄마 오늘 어디 갈 데가 있어요."

마누라 손을 잡고 서둘러 집을 빠져나갔다.


딱히 갈 데가 있어서가 아니다.

나도 안다.

내가 너 보다 더 살아봤거든.

직설화법으로 터뜨리면 그림자가 생기니까 나도 모르는 척 속아줄 뿐이다.


난 아들이 생선 가시 바를 때부터 알아봤다.

이미 네 맘이 내게서 옮겨갔다는 것을.

같이 사는 사람이 중요하지 떨어진 사람이 뭐 중요하냐.

세상 이치는 밀착 상태냐 아니냐에 따라서 가깝고 멀 고의 척도가 정해지는 법이다.

그건 아들의 생존게임이니 오히려 내가 지원군이 되어줘야 마땅하다.


제 아빠와는 전혀 딴판인 신세대 신랑의 처세술은 현실을 직시했다.

`쟤가 어디 가서 신랑수업을 단단히 받고 왔어.`

엄마에게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나는 내 색시를 사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타고 있었다.

애초에 선을 확실하게 긋는 것이 서로에게 유리하다는 걸 이미 간파했다.


아들 내외가 밖으로 나가자 멀뚱히 쌓인 설거지들을 바라본다.

바라보기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날렵한 손동작으로 그릇들을 무너뜨린다.

수돗물이 사방으로 튀고 얼굴까지 닦일 기세다.


며느리가 아예 설거지와 담쌓은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하려는 시도는 했다.

내가 말리고 아들이 말려서 개수대에서 밀려났다.


며느리가 싱크대 쪽으로 가면 두 개의 안테나가 동시에 작동한다.

"얘 나둬, 내가 할게."

"여보 여보오, 그거 하지 마 놔둬."

고개를 쓰윽 빼고 목울대가 불룩하도록 소리치는 아들의 모습이 어째 절규에 가깝다.

절대 하면 안 되는 어떤 것에 대한 다급함, 바로 그것이다.


나도 결혼을 하면서 수많은 부당함을 겪었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흔해터진 말에도 깊게 동감하며 살았다.

나는 겪어봤으니 되풀이하지 말아야지 했다.

콜콜함이 아닌 쿨한 시엄마의 모습을 보이려고 나름 애쓰고 있다.


쿨함도 좋고 현대도 좋다.

아무리 그래도 어떤 대안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나도 뭔가 실행을 해봐야 했다.

이모님?을 불러들여야 할 것만 같다.


설거지가 유난히 많이 쌓인 날 나는 결심했다.

애들이 나간 후 나는 조선남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기 어린 눈으로.


"있잖아 아무래도 나 식세기를 사줘야겠어."

"식세기?"

그는 살림에는 문외한 인 데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 조선남자다.

조선남자 시리즈를 읽어본 독자는 알 거다.


"아, 있잖아 설거지하는 기계. 그거 사달라고."

"...."

"이제 손가락도 아프고 나도 힘들어."

그렇다. 얼마 전부터 손가락이 시큰거렸다.

오래 부려먹은 손가락이 화를 낼만 했다.

이참에 잘 됐다.


그는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두 눈을 꿈뻑꿈뻑했다.

이때다.

두툼한 그의 손을 덥석 잡고서 "사줘 응, 사조~오."

아가들이 아빠 손잡고 뽀로로 완구 사달라고 졸라대듯이 애절한 눈빛으로 사달라고 애원했다.


"그럼 사."

오우! 대 성공이다.

협상의 성공비결은 내 얼굴에 있었다.

그날따라 얼굴이 벌겋게 열이 오르고 숨이 가빠지는 게 영 컨디션이 꽝이었다.

연민이란 단어가 그에게 달려와 `그래 사줘. 인생 뭐 있어.` 이렇게 동조했을 것만 같다.


그가 맘 변하기 전에 서둘러 인터넷을 뒤졌고 그중 하나를 골랐다.

식세기계의 샤넬이라나 뭐라나.

이왕 사는 거 좋은 걸로 사야지.

조선남자도 이럴 땐 현대인으로 기여를 한다.


가전제품쯤은 내가 사도 되지만 조금 큰 덩치는 조선남자를 우려먹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내 주머니 비우지 않고 나보다 능력 있는 사람 호주머니를 터는 것도 지혜라면

지혜가 아닐까.

오래도록 함께 한 마누라가 가정의 평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졸라대는 마당에

마다할 명분이 어디 있겠나.


1차에 통과가 안될 시 그다음 극본도 짜두기로 맘먹었다.

의외로 쉽게 성사가 되어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문명의 이기는 내 편이 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왔다.

요즘 흔하게 부르는 이모님이었다.


예전처럼 며느리를 맘대로 시킬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많은 시엄마들이 고민하게 된다.

누구나 TV, 세탁기, 밥솥, 냉장고, 청소기는 필수로 갖추고 있다.

식세기는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요즘 새로 신축하는 아파트는 빌트인으로 구색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가전 순위에서 뒷자리가 맞다.


두 식구만 산다면 굳이 그게 뭐 필요하겠냐만 며느리가 들어오면 문제는 달라진다.

시어머니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며느리가 불편하다.

며느리가 설거지를 하면 시엄마가 편치 않다.

괜히 시엄마 노릇하는 거 같아서 꽁냥꽁냥 심기가 들썩거린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식세기만큼 좋은 대안이 없다.


이제 확실하게 신세대 섬섬옥수 손에 구정물을 묻히지 않게 되었다.

서로 눈치작전으로 피곤한 것보다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

이젠 설거지가 쌓여도 부담스럽지 않다.

평소에는 모았다가 이틀에 한 번씩만 해도 여유롭다.


어깨가 아프네 손가락이 아프네 고운? 얼굴에 인상 찌푸리지 않기로 했다.

엉뚱하게 남편에게 눈 흘기지 않으려고 확 질러버렸다.

안되면 되게 하라.

애교든지, 강짜든지, 협박이든지, 연극이든지 수단과 방법은 많다.

이러고 보니 내가 무슨 식기세척기 홍보대사 라도 된 것 같다.

그 거하곤 아무 관련이 없다.


신문물 3종 세트라고 불리는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 빨래건조기. 이것만으로도

우리네 생활이 좀 더 자유롭다.

그 시간을 활용하면 마음이 풍요롭다.


고부관계가 껄끄럽지 않으려면 머리도 현대 버전에 맞추며 살아야 한다.

삐걱거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앞서야 한다.

뻑뻑해지려 하면 기름도 치고 연기도 필요하다.

이제는 시엄마들도 설거지에서 해방되어도 좋겠다.

식세기를 개발한 사람에게 성심당 빵이라도 한 봉지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