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곳간

다이어리

by 김 미 선

내겐 보물이 있다.

보물?

보물이라고 해서 귀금속처럼 재화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금이나 다이아몬드는 오래 묵혀도 실속이 있지만 이건 그와 반대다.

당장 버려도 누가 거들떠도 안 본다.


그것은 누렇게 변하기도 하고 고리짝 냄새도 난다.

고물상에 가져가도 몇 천원도 안될 값싼 종이에 불과하다.

다만 그것이 주는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쌓여있다.

거기엔 시간이 흐르면서 퇴적된 인생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럼 그 보물이란 게 뭐냐?

바로 일기장이다.

일기는 누구나 쓸 수 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록장이다.

누구나 쓸 순 있어도 긴 세월 한결같이 일기를 쓰긴 쉽지 않다.

그래서 보물이라 칭한다.


나는 지금까지 일기를 40여 년 동안 써오고 있다.

결혼 전 일기는 결혼식 며칠 전에 친정집 앞마당에서 미련 없이 소각시켜 버렸다.

새로운 인생에 대한 포맷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고 지나온 시간들을 지워버렸다.


결혼이라는 내 인생 항로는 새로운 방향을 틀었지만,

그 틀 안에서도 나는 꾸준하게 일기를 이어 나갔다.

단조로운 삶에서 좀 더 복잡한 역사가 일기장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둘이 엮어내는 감흥과 갈등은 딸과 아들이 태어나면서 한결 깊이를 더해갔다.

明暗(명암) 이 엇갈리는 인생사가 노트 위에 따박따박 발자국을 남겼다.


살다 보니 분홍빛으로 착각했던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새 국면으로 접어들기도 했다.

분홍빛은 회색빛으로 변해가면서 일기는 긴 서사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시가 되기도 하고 소설, 수필, 연극이 되기도 했다.

원래 우리네 삶이란 게 한 가지 무늬로만 일직선을 긋진 않는다.

신은 이 단조로움을 다채롭게 펼치라고 희로애락을 양념으로 던져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결혼생활 그것은 어쩌면 어름사니 외줄 타기와 같다.

어름사니는 공중에서 외 줄 하나를 의지해 아슬아슬한 묘기를 부려야만 한다.

자칫 잘못하면 떨어져 부상을 입기도 할 것이고 더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외줄과 어름사니의 만남처럼 그 줄은 희비쌍곡선이다.


쌍곡선속엔 오랜 결혼 생활을 이어온 할머니들이 한결같이 쏟아내는 말들이 있다.

"내 살아온 걸 소설로 쓰면 책 몇 권은 나와. 나 같은 바보 멍청이 같은 여자나

저런 사람하고 살지 다른 여자 같으면 벌써 도망갔어."

이 대목에서 변사들은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었다라고 힘주어 말해줘야 맞다.


한결같은 엄마들의 공통된 삶 속엔 恨(한)의 가락이 얹혀있다.

연식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그것을 딸들에게 한풀이 말총으로 팡팡 쏴버렸다.

딸들도 그런 엄마의 한 풀이를 공유하며 함께 울어주는 조연이기도 했다.


속상하면 혼자 이불 뒤집어쓰고 울다가 코 한 번 팽 풀어버리고 부엌을 향했던 우리들의 어머니.

그분들 보다야 함량 미달이라고 하지만 나도 크고 작은 애환들을

지금까지 짊어지고 살아왔다.

결혼은 혼자 보다 훨씬 복잡하고 애로가 뒤섞인 연극인 것이다.

즐거움보다 속 쓰린 일들이 더 혼재한 마당극이다.


내 일기장은 이런 마당극을 가감 없이 펼쳐놓고 있다.

지나온 삶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음에 더욱더 이야기 소재는 다양하고 여유롭다.

지나온 일기들을 펼쳐 놓자면 거긴 소금기 머문 자국들이 간혹 눈에 잡힌다.

눈물을 뚝 뚝 떨구면서 일기를 써나간 흔적이 남아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기장들을 다 꺼냈다.

말은 없어도 수많은 말들이 거기서 와글와글 쏟아져 나왔다.

지나온 세월은 고스란히 거기 파묻혀있다.

어둔 서랍 속에 갇혀있다가 밖으로 꺼내진 다이어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듯했다.


20230417_154101.jpg?type=w773 오래된 일기장들.



일기는 꾸준하게 쓰기도 쉽지 않지만 또 많은 양을 간직하기도 수월하지 않다.

몇 권은 이사하면서 소실되고 몇 권은 초등학생 수준이라고 버렸다.

중간중간 이가 빠졌지만 그나마 얘네들은 내 곁을 지키고 있다.

흘러갔어도 머물고 있는 시간의 창고지기다.


일기장중에 1993년 일기를 잠깐 펼쳐보았다.

30년 시간이 흘러간 자국을 들여다보니 4월 22일에 연탄 백장을 들였단다.

100장에 26,000이라고 씌어있었으며 봄 날씨 같지 않고 쌀쌀했다고 전한다.

팔 한쪽이 없던 아저씨가 힘겹게 2층 한쪽 구석에 쌓아두고 간 연탄 100장,

그것은 우리에게 내일을 열 수 있는 따뜻한 희망이 되어 주었다.


그 해 쌀이 한 말에 12,000원 굵은소금 한 되가 700원이라고 적혀있다.

계란도 한 개가 80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계란 값이 천차만별이다.

가계부가 떨어졌을 때는 일기장 한쪽에 셋방살이처럼 지출목록이 자리했다.

밭고랑에 팥이나 콩을 심듯이 그렇게 공백을 메우면서.


94년에는 동아일보 구독료가 6.000원이었다.

2003년 9월 12일 에는 태풍 `매미`가 전국에 폭풍우를 몰고 왔다고 씌어있다.

이렇듯 일기는 개인의 발자취이고 시대를 공유한 역사의 갈래다.

분명한 논픽션이고 눈 위에 찍힌 구두발자국이다.

사는 게 힘들어서 일기장 글씨체는 엉망이고 뭐에 쫓기듯 써 내려간 문장이지만,

끝없이 독려하면서 이날까지 나를 끌고 왔다.


지구상에는 70억여 명의 인간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콕 집어 택한 반쪽.

그 반쪽과 온전한 한쪽을 만들기 위해서 치열하게 분투했던 삶은 회색빛 다이어리에

온전히 간직되어 있다.


어떤 때는 남편이 잘못했던걸 지적하면 언제 그랬냐고 따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여기 쓰여있잖아." 증거를 들이댄다.

뾰족한 갈고리로 확실한 내 편이 되어 주는 순간이다.

언제나 들이밀면 내편이 되어 주는 투명한 거울이 일기장이다.


살면서 부대꼈던 생활의 미스매치들을 일기는 진실로 전해주고 있다.

비록 누렇게 변색된 노트들이지만 그 속엔 당시의 생활상이 파릇파릇 살아있다.

묵은 얘기들이 과거가 아닌 현재와 조우하고 있다.

미숙했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잘못된 걸 반복하지 말라고,

회색빛 다이어리를 쓸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절을 반추하되 재현하진 말라고 말해주고 있다.


살아온 게 실패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김호연 작가의 말처럼,

분홍빛 미래를 만들고자 노력했던 원동력은 일기장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일기장은 내 글 실력을 키워온 선생님이고,

내 눈물을 받아준 손수건이고,

세상의 쓴 맛들을 모아둔 나만의 글항아리다.

재치와 어리석음이 한데 버무려진 곳간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등을 돌린다 해도 그것만큼은 나를 꼬옥 안아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일기장이 고맙다.


일기장 속엔 함께 했던 사람들의 숨소리가 숨어있다.

누가 내게 선행을 베풀었으며 누가 내게 해악을 끼쳤는지도 채석강처럼 쌓여있다.

선행을 본받을 힘도 일기장은 갖추고 있다.

글이 머문 자리가 고약하지 않도록 다짐을 해본다.

앞으로도 단순하게 기록으로 그치는 일기장이 아닌 성찰을 통해 내가 익어가기를

바라는 힘이 담겨야 하겠다.

세상을 더듬는 빛으로, 자석으로, 거울로, 그렇게 나를 받쳐줄 수 있도록 말이다.


무엇이든 오래된 것일수록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

반면에 오래될수록 문화재처럼 빛나는 것도 있다.

삶의 파편들이 옹골지게 모여진 일기장을 내 고유의 문화재로 만들어가야겠다.

점점 여명의 시간들이 줄어들고 있다.

내 생이 갓생이었다고 말해줄 수 있으려면 일기장 속에

박힌 글들이 뭔가 교훈이 되고 향기가 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길들을 오늘도 내일도 또 열심히 일구어 가야겠다.

익어가는 가을, 유화 그림.(필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