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믿냐고요?

20160602 일기

by 김작가

1.얼굴에 드러난 다양성처럼, 기쁨을 표출하는 법도 제각각이다. 내가 아는 그리스사람 중 가장 대책없는 조르바씨는 기쁠 땐 춤을 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땐 그 느낌을 춤으로 보여달라고 한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조르바는 이해할 수 없게 낙천적인 바람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요즘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청소를 하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아 이거 이 느낌을 어떻게 발산하지?' 그리고 난 춤을 췄다. 쉐낏쉐낏.


2.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남자 주인공은 희열을 춤이 아닌 시로 표현한다. '오!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워' 이런 식으로 말이다. 9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사람이랑 친해지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데 요즘엔 내가 이런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를 멀리하는 건가.


3.사실 난 많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 <엑스맨 아포칼립스>의 빌런은 다른 엑스맨의 능력이 탐나면 흡수해버리지만 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그저 반복적으로 노력할 뿐이었다. 그 중 하나는 말의 속도였다. 영화배우들의 특유의 느릿한 속도가 있다. 천천히 말할 때 이목이 집중된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무겁게 말하려했다. 다 이런 노력 덕분에 어제 "말을 신중하게 한다. 단어 하나도 생각하고 말한다. 말투에 중력감이 있다"는 말을 듣지 않았을까. 1일 1자기자랑 끝.


4.동교동 삼거리로 회전하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지 않고 잘 서있었다. 뿌듯했다.


5.요즘엔 일러스트, 시, 소설, 에세이, 다 욕심이 난다. 천성이 소박한 것 같다. 도대체 이 취미 중에 돈 드는 게 없다. 어서 이사를 가서 작업실 겸 방을 만들어야겠다. 집 이름은 B1. 예전 지하1층에 살던 초심을 잃지말자는 것과 창경궁 비원(비밀의 정원)을 동시에 의미한다.


6.요즘 글이 안 써져서 속상했다. 어떤 작가들은 글이 안 써지면 아예 안 쓴다. 무기한 파업으로 글과 담을 쌓는다. 그리고는 그 담이 스스로 스르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린다. 또 다른 작가는 꾸역꾸역 쓴다. 무너지지 않는 담을 밀다가 보면 밀릴 거라고 믿는다(김중혁 멘트 인용).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나만의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니까. 나같은 경우에는 에세이가 안되면 소설을 쓰고 소설이 안되면 시를 쓰고 시도 안되면 그림을 그리려한다. 그래도 안되면 접는다. 오늘도 세 번이나 엎었다. 왜 그렇게 사냐고 묻는다면, 그냥 재미있어서요. 스포츠와 음주가무가 재미있듯 나도 이게 재미있어서요. 박웅현 쌤이 같은 책을 두 권 사서 아내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 말도 없이 독서를 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꼭 해야지'생각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다면 2번을 읽으시길.


7.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 별로였는데 꽤 괜찮는 사람, 기대했는데 별로였던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눈길이 가지 않는 사람. 적당한 말이 필요한 시점이다. 위험에 빠지는 이유는 그 대상이 거짓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기 때문이다(채사장 said). 시니컬한 태도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멋있다는 말보다는 간지난다는 말이 더 어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을 접하며 생각이 변하고 있다. 시니컬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남까지 그렇게 만든 건 아닌지. 애써 무시하는 태도. 집을 비웠다고해서 먼지가 쌓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대학내일 인용).알려고 노력하면 알 수 있고 포기하면 모른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8번을 읽자.


8. "운명을 기다리십니까 김씨?" "운명이요? 그게 바로 제가 기다리는 겁니다." "운명론자군요. 데스티니" "운명만 믿진 않지만 운명을 믿기는 해요. 지금 제 상태를 5분만 생각해도 운명을 안 믿을 수가 없거든요.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의 빈틈을 우연으로 채워넣었더니 어느새 운명을 믿고 있네요." 지금 내 곁에는 좋은 것들이 가득하다 우연히도(물론 노력은 기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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