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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 Oct 03. 2024

   나의 진지한 여가를 소개합니다

진지한 여가를 찾아서


대학교 입학했을 때 이름이 정확하진 않은데 가정환경 조사서 비슷한 것을 내라고 했다. 그때 취미와 특기를 쓰는 란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어려운 형편에 취미고 특기고 개발할 기회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남으면 책을 읽었다. 다른 놀 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책 읽는 것이었다. 취미는 그래서 가장 무난하게 독서로 적었다. 


문제는 특기였는데 정말 잘하는 게 없었다. 발표회가 있으면 객석에서 묘한 문화격차를 느끼며 박수를 치던 1인이 나였다. 고민 끝에 특기란에 ‘숨쉬기 운동’이라고 적었다. 같이 입학했던 친구가 ‘너 이런데 장난하면 안 된다’고 정색했지만 나로서는 진지한 답변이었다. 어쩌면 특기가 없다는 자격지심이 냉소 반, 허세 반 뒤섞여 표현된 것일 수 있다.


80년대 다녔던 대학은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곳이었다. 취미나 특기는 사치이자 의식의 부족으로 여겨졌다. 취미나 특기가 없는 것이 오히려 당당할 수 있는 특이한 시절이었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다니면서는 일과 육아에 치여 취미를 가질 여유도 특기를 개발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


은퇴를 하고 보니 취미와 특기가 없다는 것이 배 한 척 없이 전장에 던져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시간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은퇴 후 1년이 지났다. 아직까지 나의 진지한 여가는 탐색 중이다.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지라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다. 


공부 


내 인생을 관통하는 것에 공부가 있다. 대학까지는 사회진출을 위해 공부했고, 직장에서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인생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낸 셈이다. 그런데 은퇴를 하고 나서도 여전히 공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고백하자면 나에게는 오래된 질병이 있다. 문자 중독이라는 병이다. 다행히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뉴스를 읽는다. 자기 전에도 책을 읽어야 잠이 온다. 비행기를 타면 대부분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나는 전자책을 다운로드하여 책을 읽는다. 공부를 좋아한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글을 읽는 것은 몸에 배어 있다. 내가 시간을 보내는 흔한 방법이다. 제로베이스라 생각했는데 나에게도 배 한 척은 남아 있었던 셈이다.


독서가 반드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 때우기용 독서도 많다. 이왕이면 독서가 공부가 되도록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현재 3개의 모임을 한다. 하나는 친목 겸 독서 모임이다. 30분 책 얘기를 하고, 3시간 다른 얘기들로 수다를 떤다. 가볍지만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는다. 두 번째는 정식 독서모임이다. 아는 사람 반, 모르는 사람 반으로 구성했다. 수다 보다 책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여기서도 다양한 책을 읽지만 발제도 하고 학구적인 책도 읽는다. 


마지막 모임은 과학 공부 모임이다. 대학 친구 4명이 하는 <문과 여자들의 과학공부(?)>다. 가장 진지한 공부모임이다. 


과학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의 생존 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과학은 본질적으로 재미있는 것이다. 인류가 자연에 대한 이해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칼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나오는 말이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재미있는 것이라는 유혹으로 시작했으나 아직은 수박 겉핥기 수준이다. 고등학교 이후 처음 하는 과학공부다 보니 따라가기 급급하다. 그래도 우리에게 과학에 기쁨을 느끼는 유전자가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 말을 믿고 힘들지만 꾸준히 하고 있다. 세 모임 중 가장 진지한 공부 모임이다. 사는 곳이 멀어 주로 랜선으로 만나는데 보통 2주에 한번 만난다. 지난번에는 고등학교 과학교사를 했던 선배님을 모시고 랜선 강의도 들었으니 공부에 진심인 모임이 맞다. 우수한 학생은 아니나 노력하는 성실한 학생들이다. 


과학 공부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낡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양자역학의 시대에 나의 사고는 뉴튼역학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요즘 과학은 우주와 양자의 세계를 같이 설명할 수 있는 궁극의 이론을 추구하고 있다니 그 원대한 야망에 입이 벌어졌다. 이건 예전에 철학이 하던 일이 아닌가? 나도 나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셈인데 지금 보니 세상을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과학이 하고 있다. 


은퇴 후 시간이 길어진 지금, 공부야말로 진지한 여가가 될 수 있는 유력한 후보다. 평생학습이란 말이 진부한 레토릭이 아니다. 고미숙은 인간이 평생 공부를 하는 호모 쿵푸스라고 말했다. 이제 학벌이나 취업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 시험도 없고 성적으로 나를 증명할 필요도 없다. 내 맘이 내키는 대로 하면 된다. 여가로서 하는 공부의 좋은 점이다. 지금까지 공부는 나에게 일이었다. 이제야 공부가 여가가 되었다.


그림 그리기 


그림 그릴 때 내 등에는 커다란 스티커가 붙어 있다. ‘왕 초 보!’ 

그림이야말로 나에게는 진짜 제로베이스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학교 미술시간에 배운 게 전부다. 자투리 시간에 그림 낙서도 해본 적이 없으니 숨겨진 기본기도 전혀 없는 상태다. 


그런데 운이 좋았다. 내가 처음 수채화를 배운 곳은 지역에 있는 그림 커뮤니티다. 이곳은 그림의 왕 초보도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문턱이 낮고 아주 쉽게 가르친다. 가장 좋은 것은 격려와 지지가 넘친다는 점이다. 아무리 그림을 못 그려도 늘 잘했다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준다. 고래를 춤추게 하는 칭찬이 넘치는 곳이다. 이곳을 만나 정말 생초보인 내가 그림에 입문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신 분들은 마을 화가로 활동하신다. 지역에 그림이 필요한 곳에 전시도 하고 나 같은 초보자를 가르치는 강사 역할도 한다. 이곳은 그림 강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도 형성되어 있다.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동아리가 여러 개 있어 매주 만나 그림을 그린다. 정말 놀랐던 것은 커뮤니티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아리, 수채화 강좌, 전시회, 지역사회 활동 등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이곳이야말로 진지한 여가의 모범적인 사례다. 개인 차원의 진지한 여가가 지역사회 차원으로 발전했으니 더 그렇다.


그림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몰입감을 준다. 왕초보도 기법을 하나씩 배우면, 어설픈 그림이라도 완성을 시키면 성취감을 느낀다. 오래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 생기고 그림을 보는 안목도 생긴다고 말한다. 


아직은 그림에 전념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그림은 노년을 위한 나름의 장기 포석이다. 70이 넘어 활동성이 떨어질 때 진지한 여가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왕초보 딱지를 뗄 정도를 목표로 쉬엄쉬엄 하고 있다. 


글쓰기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


은퇴 전에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 공부할 때 리포트를 쓰거나 업무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 말고는 없다. 퇴직 후 남편을 따라 영국에 6개월 정도 갔다 왔다. 지인들이 영국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는데 같은 얘기를 여러 번 반복하기도 번거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블로그에 영국 생활과 여행에 대해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주변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친한 사람들이라 평가가 많이 후했을 것이다. 더구나 내 글에 대한 기대 수준도 낮았을 것이다. 그것을 감안해도 재미있고 잘 읽힌다는 반응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글 쓰는 것이 직업인 아들이 나름 괜찮다고 평가해 주었다. ‘난 역시 고래과야. 칭찬에 춤추는.’ 뒤늦게 새로운 싹이 가슴에 움트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많이 부족해도 시도를 해 볼 마중물이 되어주었다. 


인터넷 시대가 되니 글쓰기는 많은 사람의 욕망이 되었다. 아날로그 공간에서는 글이 아니라 말이 주가 된다. 그러나 디지털 공간에서는 말이 아니라 글이 주가 된다. 물론 요즘은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로 인해 영상이 주가 되는 세상이 되었지만 글이 작동하는 공간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제 사람들은 영상으로, 글로 세상을 만난다. 문화센터 글쓰기 강좌에 가봐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작가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글쓰기는 은퇴 후 부담 없이 진입할 수 있는 여가생활이다.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다는 것도 글쓰기의 장점이다. 물론 이것이 성공의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글쓰기로 성공하겠다는 생각만 뒤로한다면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좋은 활동이다. 글로 성공하다면 좋겠지만 이 나이에 성공이 없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글쓰기 자체로도 나름 의미가 있다. 글을 쓰기 위해 공부를 하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사고가 성숙해지는 것도 글쓰기의 중요한 효과다. 

지금 나의 글쓰기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아직은 미지수다. 그래도 나를 성장시키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글쓰기 역시 진지한 여가를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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