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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 Sep 30. 2024

진지한 여가를 아시나요?

신중년 시절을 보내는 방법 3

은퇴를 하고 보니, 가능한 일을 할 수 있다면 일을 하길 권하고 싶다. 그냥 놀기에는 아직 젊다. 그러나 일을 할 수 없거나 안 해도 되는 사람이라면, 그러면서 일상적 여가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제3의 길을 제안하고 싶다. 바로 진지한 여가다.


은퇴 후 삶에 대해 모색하던 중 우연히 인터넷 기사에서 진지한 여가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보는 순간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떠올랐다. 목욕탕 욕조에 몸을 담그다,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다는 그분 말이다. 얼마나 기뻤던지 벗은 상태 그대로 거리를 달리면서 외쳤다지 않는가! ‘유레카’ 

나 역시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찾던 것이 이건가 봐!’


진지한 여가(serious leisure)란 특수한 기술, 지식 그리고 경험 등을 획득하고 표출하는 충분히 본질적이고 재미있고 참여자가 경력을 쌓아가는 성취감 있는 체계적인 활동을 말한다. 


이 개념은 캐나다 캘커타대학교 교수인 로버트 스테빈스 교수가 제안한 개념이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개념이 아닌지 자료가 많지 않았다. 논문으로 발표된 자료가 좀 있었다. 그래서 스테빈스 교수의 책 <진지한 여가>를 구입했다. 직접 읽고 난 소감을 말하자면 굳이 직접 읽기를 권하고 싶지 않다. 책이 대중적이기보다 학구적이기 때문이다. 개념을 엄밀하게 정립하고 다른 분야로 확장하려는 시도가 많아서 진지한 여가 개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진지한 여가를 이해하기 위해 정공법이 아닌 주변 공략법으로 접근해 보겠다. 예전에 젊었을 때 맘에 드는 이성을 공략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알려진 것이다. 상대방에게 직접 공략하는 것도 좋지만 그 주변 사람들을 공략해서 간접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 잘 먹인다는 그 방법이다. 단 이 방법의 허점은 주변은 다 포섭해도 당사자는 공략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공법이 좋으신 분들은 직접 책을 읽어보셔도 좋다. 


먼저 진지한 여가와 대비되는 일상적 여가를 알아보자. 일상적 여가(casual leisure)란 특별한 훈련도 거의 필요하지 않고, 즉각적인 보상과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유지되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여가활동이다. 

여기서 핵심은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냥 일상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여가다. 공원산책, TV시청, 독서, 게임, 사교적인 대화 등 최소한의 지식, 기술, 경험만 있으면 가능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가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활동이 일상적인 여가다. 이에 비해 진지한 여가는 특수한 지식이나 기술 등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 다른 핵심은 즉각적이고 단기적인 즐거움을 준다는 점이다. 이점에서도 진지한 여가의 보상인 성취감이나 자아실현과는 다르다. 


아직도 구체적인 상이 와닿지 않는다면 사례를 들어보자.

내 생각에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사람은 모지스 할머니다. 미국의 민속화가로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는 말도 있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라는 책을 보면 할머니의 인생과 그림을 볼 수 있다. 모지스 할머니는 76세가 되어서 그림을 시작했다. 관절염으로 뜨개질이 어려워지자 대신하게 된 취미가 그림이다. 그리는 것이 좋아서 하루 종일 그리기도 했다. 10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하니 얼마나 열심히 그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80이 넘어 처음으로 전시회도 열었다. 나중에는 타임지에 실리는 등 부와 명예도 얻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부와 명예는 진지한 여가가 낳을 수 있는 부수적 효과이지 핵심은 아니다. 오히려 진지한 여가와 밀접한 것은 온종일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비슷한 예로 캐나다 민속화가 모드 루이스도 있다. 이분은 영화 <내 사랑>을 통해 알게 되었다. 샐리 호킨스와 에단 호크가 모드와 그 남편으로 열연한다. 모드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었다. 가난한 어부의 아내였으나 살림을 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처음에는 벽이나 식탁 같은 곳에 그리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오두막 대부분을 그림으로 채운다. 카드를 그려 팔기도 한다. 유명세를 얻었으나 오두막을 떠나지 않고 소박한 일상을 유지한 채 평생 그림을 그렸다.  


가까운 주변에도 있다. 나보다 먼저 퇴직하고 늦은 나이에 수채화를 배우는 선배가 있다. 이분은 일주일에 3일을 그림 그리는데 쏟는다. 하루는 문화센터에서 데생을 배우고, 하루는 지역 그림 동아리에서 그림 벗들과 그리고, 하루는 수채화 강좌를 듣는다. 일주일에 최소 3일을 그림을 그리면서 보낸다. 미국에 사는 딸을 방문하러 갔을 때에도 관광 보다 미술관 투어를 하고 왔다. 퇴직 후 생활의 중심이 그림 그리기다. 이 정도면 거의 미술대학을 다니는 수준이다. 수채화를 시작한 지 3년쯤 됐는데 실력도 많이 늘었다. 지금 그림에 입문한다고 모지스나 모드처럼 부와 명예를 얻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림 그리기는 몰입감을 주고 성취감을 준다. 이런 게 전형적인 진지한 여가다. 


예를 들다 보니 그림 그리는 사람만 소개했다. 합창을 통해 진지한 여가를 실천하는 분도 있다. 벌써 퇴직한 지 10년쯤 되는 분이다. 퇴직 후 10년 전부터 여고동문 시니어 합창단에 들어가 활동했다. 작년부터는 지역 시니어 합창단에서도 활동하신다. 지역 시니어 합창단은 성악을 전공한 사람들도 있어 수준도 있고 정기공연도 한다. 입단도 오디션을 봐야 가능하다. 여고 동문 합창단은 그 정도 수준은 아니지만 매주 하루 연습을 한다. 얼마 전에는 미국 공연을 다녀왔다. 이분이 60대 후반인데 그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 80이 된 선배들도 계신다. 그래서 미국 공연을 갈 때 총무를 맡았다고 한다. 공연 진행도 하고, 관광 일정도 관리하는 일이다. 힘들었지만 다시 직장을 다니는 느낌도 났다고 한다. 10년간 합창단을 해온 보람과 의미를 느꼈다고 한다. 이런 것도 진지한 여가가 될 수 있다.


꾸준한 자원봉사도 진지한 여가가 될 수 있다. 한 친구는 퇴직 후 학교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원래 책을 좋아해서 나와 독서모임을 같이 하는 친구다. 그 학교는 사서교사가 없기 때문에 2명의 자원봉사자가 사서 교사 일을 한다. 이 친구는 일주일에 이틀 도서관에 출근한다. 처음에는 도서관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주변 국어선생님에게 도서관 운영에 대해 자문을 받고 공부도 했다. 2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꾸준히 하고 있다. 우리가 놀자고 해도 도서관 가는 날은 빠지면 안 된다고 거절한다. 같이 자원봉사를 하는 분도 70이 다 되신 분으로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오셨다고 한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렇게 성실하고 꾸준하게 봉사활동하는 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든 사례는 내 관심사와 주변에서 고른 것이라 좀 한정적이다. 스테빈스 교수는 아마추어 스포츠 활동도 진지한 여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처음 진지한 여가 개념을 발견한 곳도 이 스포츠 활동이다. 


마지막으로 진지한 여가는 일을 통한 자기실현과 다른 길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일을 많이 하는 시대다. 산업혁명 초기에 비해 노동시간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노동강도나 평생 노동시간 등을 고려하면 일이 지배적이고 중심인 사회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심지어 최근에는 엘리트일수록 일을 더 많이 한다는 얘기도 있다. 대형 로펌에서 일을 하면 뼈를 갈아 넣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일을 통한 자기실현이 주류인 시대를 살고 있다. 


나도 직장을 다닐 때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보람을 얻고자 했다. 여가는 일을 재충전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거나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일 중심 사회에서 한발 비껴 보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개념보다 여가를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개념이 더 오래된 것이다. 학문과 예술도 귀족 같은 유한계급에서 생겨난 것이다. 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다른 분야에서 계발할 수 있었다. 


은퇴를 한 지금, 노동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지금, 이제는 일이 아닌 여가를 통해 자기실현을 모색할 수 있는 시절이 왔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내가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진지한 여가를 찾아보는 것이다. 직장과 육아로만 채워졌던 시절, 자신의 취미도 모르고 잘하는 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지금이야말로 앞으로 무엇을 할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새로운 여가 진로를 탐색하는 시기가 되었다. 남는 건 시간뿐,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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