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타운 마인드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에 서울과 경기도를 계란 노른자와 흰자에 비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비유에 따르면 나는 노른자와 흰자의 경계선에 있는 흰자에 살고 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마을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몸은 흰자에 있었지만 직장이 노른자라 집은 베드타운 그 이상이 아니었다.
한동안 학교에서 마을결합형 교육과정이 유행한 적이 있다. 아니 메가시티 서울에서, 인터넷 강국인 한국에서 아날로그적 마을이라니, 시대착오적인 개념 아닌가? 그런 의구심을 가졌다. 마을 살리기 움직임도 아파트 공화국, 부동산 투기의 시대에 너무 나이브한 운동 아닌가? 냉소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내가 마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베드타운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이다. 내 주 생활근거지는 서울이고 여기는 그저 잠만 자는 곳이라는 그런 마인드.
마을의 발견
은퇴를 하니 나의 주 생활근거지가 마을이 된다. 산책, 도서관, 문화생활 등 대부분의 생활이 마을에서 이루어진다. 은퇴한 나뿐만이 아니다. 학생들, 주부들, 마을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을이 주 생활공간이다. 아무리 베드타운 도시일지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곳은 생활의 주 공간이다.
곳곳에 걷기에 좋은 장소를 발견하고 있다. 아파트 주변에 작은 공원들, 찻길 주변의 가변공원도 있다. 집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작은 산이 있다. 맨발 걷기 하기에 좋은 곳이다. 여기는 은퇴 후 처음 알았다. 출퇴근 때 늘 지나다니던 곳이지만 산책로가 있다는 것을 20년 만에 알게 되었다. 만들어진 지 10년이 넘은 생태공원도 처음 가보았다.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었네.'
호수 공원도 새롭게 알아 간다. 20여 년 전 이사 왔을 때 처음 가보았다. 뭔가 휑한 것 같고 인공적인 호수라 정감이 가지 않았다. 그 후로 거의 가지 않았다. 코로나 때 오랜만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세월의 힘이라는 게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 나무들이 무성해지고 식물군도 무척이나 다양해졌다. 이제는 자연공원인 듯 자연스러워졌다. 유럽에서 가 본 몇몇 공원들보다 더 괜찮았다. 런던의 유명한 하이드 파크보다 이곳이 더 다채롭다. 가까이 있어 그 좋은 점을 모르고 살았다. 이제는 30도가 넘는 한 여름철에도 다리 밑 호숫가에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는 것도 안다.
이제는 마을에서 살기 위해 이왕이면 장도 동네에서 보려고 한다. 직장 다닐 때는 배달엡이 내 주요한 쇼핑공간이었다. 얼마 전에 배달앱 멤버십을 해지했다. 이제는 편한 것보다 움직이는 게 더 필요하다. 새벽배송의 편리함이 아쉽지만 건강을 위해서도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서 장을 보자고 생각했다. 물론 인터넷 쇼핑을 끊은 것은 아니다. 비중을 줄이려는 것이다.
운동, 취미를 배울 수 있는 다양한 문화센터, 체육센터, 주민센터 들도 많다. 수영, 요가, 댄스 등 다양한 운동을 배우고, 할 수 있다. 문화센터에도 그림, 악기, 글쓰기 등 다양한 강좌가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된다.
도서관이 좋다
은퇴 후 도서관이 은퇴자에게 얼마나 좋은 곳인지 알게 됐다. 이 도시는 도서관이 많다. 20개가 넘는다. 옥스퍼드보다 많은 편이다. 옥스퍼드는 인구가 17만 정도 되는데 시립 도서관은 하나다. 물론 대학 도시인만큼 대학 도서관은 많지만 일반인이 이용할 수는 없다. 그에 비하면 5만 명 당 시립도서관이 1개인 셈이니 훨씬 나은 편이다.
처음에는 학생들 위주라 나이 든 사람이 가는 게 민폐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막상 가보니 남녀노소 구성이 다양했다. 말 그대로 시민을 위한 도서관이 맞았다. 책을 읽기도 좋고 노트북을 사용해도 괜찮다. 예전에는 노트북을 사용할 공간이 없어 도서관을 자주 가지 않았다. 지금은 카페에 있는 것보다 도서관에 있는 게 더 좋다.
요즘은 도서관 비교 탐방도 하고 있다. 꼭 집 근처 도서관만 갈 필요가 있나? 다 같은 시립 도서관인데. 도서관마다 특징도 다르고 장단점도 있어 다니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사실은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운 도서관이 좀 궁색한 게 원인이 되었다. 그리 오래된 도서관은 아니나 열람실이 없다.
한때 도서관 사서 선생님 중에 도서관 열람실을 반대하는 분들이 있었다. 도서관이 독서실로 전락한다고 분개했다. 막상 우리 동네 도서관을 보니 독서실로 전락하지 않았으나 도서 대여점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나도 그 도서관을 가면 분개한다. 도서관이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다양한 공간이면 안 되는가? 주민들의 요구가 있었던지 종합자료실 층간의 비좁은 공간이 옹색하게나마 열람실 역할을 한다.
옥스퍼드 시립도서관의 좋은 점이 있다. 그곳에는 우리나라처럼 엄숙하게 공부만 하는 열람실이 없다. 대신에 우리나라 종합자료실같이 책도 있고 공부도 할 수 있는 공간이 도서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곳에서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노트북으로 각자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학생들이 바닥에 누워 숙제를 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대학 도서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곳에서는 노트북을 사용하지 못하는 공간이 없다.
요즘 세상이 바뀌는 만큼 도서관도 변해야 한다. 카페에 가야 공부가 잘된다는 카공족도 있지 않은가? 지나치게 엄숙하고 조용한 열람실이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열람실을 줄이고 노트북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늘었으면 좋겠다.
마을을 살리는 공공성
은퇴 후 나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마을의 공원, 산책로, 도서관, 문화센터 등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공적 투자로 만들어진 공공시설이다.
작년에 옥스퍼드에서 6개월 정도 지냈다. 유럽은 처음인지라 기대가 컸다. 막상 가보고 제국이 몰락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내가 느낀 것은 공공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런던 지하철을 타본 사람은 다 느낄 것이다. 낡고 비좁고 지저분하다. 오히려 지저분하다고 소문났던 파리의 지하철이 훨씬 깨끗했다. 파리는 몇 년 전에 지하철 차량들을 거의 다 교체했다고 한다. 런던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노선은 마주 앉은 사람과 너무 가까워 인사라도 나누어야 될 것 같은 거리다. 어떤 지하철역은 달팽이관처럼 한참을 내려가야 해서 무서웠다. 민영화가 되면서 투자가 안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의료보험이 망가졌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옥스퍼드에 사는 한인 아줌마들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남편이 퇴직하면 한국에 돌아오고 싶다고 했다. 영국은 민간 보함으로 이용하는 병원과 국가 보험으로 운영하는 NHS로 이원화되어 있다. 직장을 다닐 때는 걱정이 없지만 NHS로 가면 진료받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국 노인들은 참을성이 많다는 말도 했다. 감기나 사소한 병으로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칭찬이 아니다. 병원 진료를 하려면 대기 시간이 워낙 길기 때문에 그냥 포기하고 산다는 의미다. 가슴 아픈 일이다.
예전에 마이클 무어 감독이 만든 <식코>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 의료체계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던 영상이다. 그런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실상을 보았을 때는 좀 충격이었다.
영국에 그나마 공적 투자가 유지되는 곳은 박물관과 갤러리다. 대부분 박물관과 갤러리가 무료다. 한국에 와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하니 반응이 재밌다. 원래 자기네 것이 아니고 약탈한 문화재니 돈을 받는 것은 뻔뻔하다는 반응이다. 물론 박물관만 무료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국공립 갤러리도 대부분 무료다. 몰락하는 제국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걸까? 그러나 앞으로 갤러리도 무료가 아닌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을에서 살다 보니 공공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각종 문화, 체육센터나 도서관, 공원들은 다 공공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무료 거나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도 영국처럼 이런 부분을 축소해 나가면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 직격탄을 받게 된다. 화려하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주요한 부분이라는 걸 은퇴를 하고 깨닫게 되었다.
내가 직장을 다니던 서울 변두리에 지역 주민이 애용하는 공공시설이 있다. 50+도 있고 사무실도 있고 카페도 있어 나도 여러 번 가봤다. 학생들을 데리고 견학이나 체험활동도 여러 번 간 곳이다. 이곳이 복합 쇼핑몰과 아파트 단지로 바뀐다고 한다. 그러자 이곳에 사는 지역주민 일부가 개발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은퇴 전에는 '덕분에 부동산 가격도 오르고 좋은 일 아닌가?'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개발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개발을 해서 이득을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곳을 생활 터전으로 삼아 마을에 사는 사람은 좋은 활동 공간을 빼앗기는 것이다.
안국역 근처에 송현공원이 있다. 지나갈 때마다 감탄을 한다. 높은 빌딩 사이에서 숨통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 한복판에, 엄청 비쌀 것 같은 땅에 누가 저런 공원을 만들었을까? 볼 때마다 감탄과 감사를 보낸다.
달리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천천히 걸으니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