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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 Oct 14. 2024

인정욕구에서 자유롭게

평소 나는 나쁘게 말하면 합리화의 달인, 좋게 말하면 긍정의 화신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은퇴 후 인정욕구로 힘들어할 수 있지만  조금만 발상을 전환하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말하자면 "물이 반이나 남았네." 법칙이다.


은퇴를 하고 좋은 점은 인정욕구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은퇴하기 전까지 우리는 인정을 얻기 위해,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자식을 키우는 대부분의 과정이 그렇다. 그러나 은퇴를 하고 나면 그런 많은 인정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이 열린다. 그동안 사회에 기여를 한 만큼 이제부터는 인정을 앞세우는 삶을 살 필요가 없다.


자식을 통해서 나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부모에게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을 보고, 자식도 키워 본 지금 자식이 어떻게 자라는가는 일차방정식이 아니라 복잡한 고차방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타고난 기질과 환경 중에 어느 것이 더 영향을 끼치는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부모, 친구, 학교, 사회 등 아이들이 성장하는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다양하다. 어릴수록 부모의 영향이 있겠지만 커갈수록 다양한 요소가 성장에 작용한다. 학부모님과 상담을 하다 보면 학교에서 아이들이 보이는 모습과 집에서 보이는 모습이 다른 경우도 많다. 어느 순간부터 자식의 성장이 나의 손을 떠나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내 배로 낳았어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게 자식이다.


대학진학과 관련해 부모의 경제력이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는 많다. 집단으로 볼 때 강남출신이 의대나 상위권 대학을 많이 간다는 통계도 있다. 집단적인 차원에서 일정한 경향을 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아이를 상위권 대학에 보냈겠다고 강남으로 이사 간 친구가 있다. 오히려 수도권에서 키운 큰애보다 성과가 좋지 않았다.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 보내도 개인과의 궁합도 맞아야 한다. 


부모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고 취직을 한 것이 자식을 잘 키운 증명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잘난 자식은 남의 자식, 나아가 나라의 자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못난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옛말도 있다. 예전에 한 선생님이 아들이 대학에 입학한 후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아들이 고등학생일 때는 공부를 못하니 그저 부족한 자식이라 생각했어. 대학은 좋은 곳을 못 갔지만 알고 보니 우리 아들이 아르바이트도 잘하고 사회성도 좋고, 성실하고. 공부 빼곤 다 괜찮은 아이더라고.” 


사회적 성취가 자식의 모든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자식을 키우는 것은 고차방정식이다. 자식을 키우면서 다짐하는 것이 있다. 자식이 잘된 것도 내 덕이 아니고 자식이 못되어도 내 탓이라 생각하지 말자. 아이들에게 내가 해야 할 것은 하되 그 결과는 내 몫이 아니다.


사회적 성취가 반드시 능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는 많이 있다. 

교사가 되어서 놀란 일이 있다. 밖에서는 능력 있는 교사가 교장이 된다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막상 학교에서 보니 교사로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 학생들과 관계 맺음이 어려운 사람들이 교장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학생에 대한 애정이 넘쳐 교육에 헌신하는 교사들은 승진점수를 챙기지 못해 교장이 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승진은 교사로서의 능력에 비례하지 않고 승진욕구에 비례한다는 생각을 했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좋은 관리자도 많다. 요즘은 좋은 교사가 교장, 교감이 되는 경우도 많다.) 


사회에서도 능력과 노력에 비례해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성취는 능력과 노력의 대가라기보다 운의 영향이 크다는 얘기도 있다. 요즘 실감하는 명언이 있다. ‘운칠기삼.’ 세상사 많은 성취에 운이나 우연이 더 많이 작용한다는 속어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운칠기삼’을 품격 있게 설명한다.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 르브론 제임스는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인 농구를 하며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 탁월한 운동 재능을 가진 것 말고도, 르브론은 그 재능을 가치 있게 여기고 보상해 주는 사회에서 산다는 행운을 누린다. 그가 잘할 수 있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 살고 있음은 그가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처럼, 농구선수가 아닌 프레스코 화가가 각광을 받던 사회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노력이 그만큼 중요하더라도, 노력만 가지고 성공하기란 드문 일이다..... 르브론만큼 열심히 연습하는 농구선수는 많다. 그러나 코트에서 그와 같은 기량을 보이는 선수는 많지 않다. 내가 밤낮으로 수영연습을 한들 마이클 펠프스보다 빨리 헤엄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사인 볼트는 훈련 파트너인 요한 블레이크가 자신보다 훨씬 열심히 훈련한다고 밝혔다. 노력은 다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내가 인생에서 성취한 것도 우연과 운이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하면 겸손해진다. 제대로 이루지 못했더라도 반드시 내 탓이 아니니 자책할 필요도 없다. 진인사대천명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나로서 최선을 다했으면 그 결과는 내 몫이 아니다. 


나이를 먹으면 그동안 우리가 성취한 많은 것들이, 인정의 대상이 되었던 많은 것들이 큰 의미가 없어진다. 출처도 모르고 근거도 확실하지 않은 인생 평준화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봄직한 법칙이다. 

50대는 지식이 평준화되고, 60대는 외모가 평준화되고, 70대는 성이 평준화되고, 80대는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먹고사는 데는 별 차이가 없기에 부가 평준화가 되고, 90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모호하니 생사가 평준화된다.


속설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으니 나름 세상의 통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학벌, 외모, 재산 등 젊어서 성취하고자 하는 많은 것들이 나이가 들수록 차이가 없어진다. 정말 다행이다. 이제 이런 것들을 얻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나이가 들어 재산이 많은 게 꼭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한국 최고 부자에게서 본 적이 있다. 돈이 너무 많아서 맘대로 죽을 수도 없었던 그분 말이다. 


 예전에 들었던 우스개 소리가 있다. “젊어서는 세상을 바꾸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좀 더 나이가 들면 주변이라도 바꿀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늙으면 TV채널이라도 바꿀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나이가 들면 세상을 바꾸는 것도, 주변을 바꾸는 것도 힘든 일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을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바꿀 수 있다면 자신뿐이다. 이제는 사회적 성취에서 눈을 돌려 나의 성숙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종심소욕불유구’라는 말이 있다. 공자가 나이 일흔에 이르렀다는 경지다. 대학에서 논어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다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교수가 이 말을 설명한 것은 인상에 남았다. 자기 맘대로 하는데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인격이 성숙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당시 20대였던 나로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리에 어긋나는 수많은 욕망과 싸우던 시절이니 더 그랬다. ‘저런 경지가 실현 가능한 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이가 드니 공자가 만만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공자님, 죄송합니다.) 이제는 에너지가 부족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도 쉽지 않다. 여러 욕구가 줄어들어 도리에 어긋남을 걱정할 필요도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60여 년을 살면서 공동체의 규범들이 내 몸에 많이 체화되어 있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 남에게 민폐가 될 수는 있어도 마음만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가 멀지 않아 보인다. 이 또한 "물이 반이나 남았네."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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