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생활을 위한 다짐 2
추락의 해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직선에 대한 환상이 있다. 인간의 삶도 뭔가 직선의 방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가 물질적으로도 기술발전이나 인구수 증가 등에서 진보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60년대생이 팽창하는 경제시기에 계층상승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범주가 다름에도 나이가 들면 좀 더 현명해지고 지혜로워질 것 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은퇴를 하고 보니 이제 인생에 남은 것은 상승이 아니라 추락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현실을 보면 나이가 드는 것이 나의 성숙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쇠락하고 낡아진다.
심지어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는 말도 있다. 오랜 기간 시아버지를 모시고 힘들지 않다고 말하던 친구가 있었다. 요즘 보기 드문 며느리였다. 그러나 시아버님이 80세가 넘으시면서 시아버님에 대한 존경심을 잃었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나름 점잖고 경우도 있으신 분이 어느새 본인 위주가 되셨다고 한다. 손주와 함께 식사할 때도 맛있는 반찬은 당신 앞으로 당겨서 드시는데 심정이 복잡해졌다고 한다.
우리 스스로도 노인이 되면 아이처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 손주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진 할머니가 계셨다. 자식들은 할머니가 사실을 아시면 충격을 받는다고 쉬쉬했다. 자식들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노인들의 건강이 위태하니 작은 충격에 타격이 클 것이다. 그러나 80년을 살아오시면서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일 텐데, 손주를 애도할 기회도 주지 않는 게 정당한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그 할머니였다면 더 비통하지 않을까? 물론 이 또한 입찬소리일 수 있다. 그래도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알고 싶을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쇠락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성장이 직선이 아니듯 추락도 직선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사에 직선은 없다. 상승도 굴곡과 침체를 겪은 나선형 상승이다. 좋은 날도 있고 궂은날도 있었다. 추세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락 역시 직선은 아닐 것이다. 좋은 날과 궂은날이 뒤섞인 나선형 추락이리라.
얼마 전 급속한 노화의 변곡점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연구한 결과라고 한다. "우리는 시간이 따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몇 번의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40대 중반과 60대 초반, 70대 후반이 노화의 극적인 변화의 시기다."
이 얘기는 경험칙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먼저 퇴직한 분들이 오히려 퇴직 후 건강이 더 좋아졌다는 말을 많이 한다. 신체적 노화도 직선이 아닌데 정신적 쇠락도 마찬가지 아닐까? 추세적 하락을 피할 수 없어도 그 속도는 늦출 수 있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 좋아지는 것도 있지 않을까?
추락에 날개 달기
그래서 다짐했다. 나이가 들면서 가만히 있으면 그냥 낡아진다. 젊었을 때처럼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거나 앞서가는 것은 못할지라도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자.
젊었을 때에 비하면 책 읽기가 쉽지 않다. 오랜 시간 집중하는 것도 어렵고 눈이 아파 중간중간 쉬어주어야 한다. 심지어 어떤 때는 그렇게 힘들게 읽은 책들이 서로 얽히는 경우도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얘기하는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뒤섞여 얘기를 하고 있었다. 책을 1/3을 읽을 때쯤에야 이전에 읽은 책임을 알게 된 적도 있다. 그래도 책 읽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책에 대한 이해력과 통찰력이 좋아졌다는 생각도 든다. 젊어서는 전체 맥락을 모르면서 책을 읽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 또한 기억의 왜곡,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르겠다.)
책 읽기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였다. 언제 깨서 울거나 놀아달라고 할지 몰라 틈틈이 책을 읽었다. 그때 이름 붙인 것이 게릴라 책 읽기다. 긴 책을 읽기가 어려워 짧은 글 중심으로 읽었다. 그때 생각했다. 형편 되는대로 읽자.
젊어서는 아날로그를 추구하고 급속하게 변해가는 스마트 세상에 저항하는 것이 나름 낭만도 있고 품격도 있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 멋이 아니라 낡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터넷 택시 어플을 이용하지 않은 친구가 있다. 전화로 택시를 부르면 된다며 어플을 깔지 않았다. 얼마 전 자정이 넘어 택시를 호출하려고 했다. 택시를 잡지 못해 지하철역에서 40여분을 걸어갔다고 한다. 결국 그 친구는 어플을 깔고 사용법을 익혔다.
옥스퍼드에서 만난 영국 노인들은 우리보다 인터넷 세상에 대해 거부감이 더 강한 것 같았다. 여러 번 시위대를 만난 적이 있는데 디지털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반대하는 구호가 많아 놀랐다. 경각심 없이 변화를 쫓아가는 모습도 문제지만, 변화에 저항하는 이런 태도도 영국 몰락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교사들은 코로나19 시절에 컴퓨터 활용능력이 많이 향상되었다. 온라인으로 강의, 파워포인트 만들기, 영상 제작, 편집하기 등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덕분에 학생들보다 컴퓨터 활용능력이 더 좋아진 부분도 있다. 요즘 아이들은 피 속에 디지털이 흐른다며 본능적으로 스마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서 보면 검색은 잘해도 컴퓨터를 활용하는 능력이 부족한 학생도 많다. 타고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많이 접하고 해 보면 나이와 상관없이 터득할 수 있다. 피에 디지털이 흐르지 않아도 낯설지 않게 이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열려 있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스웨덴 출신 스님이 쓴 책 제목처럼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젊어서는 신념을 위해 사는 것이 가슴 떨리는 삶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신념이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70년대 필리핀 정글에서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일본군 장교가 발견된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나 인간의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 군인은 일본의 패전을 인정하지 못하고 30여 년을 필리핀 정글에서 홀로 전쟁을 계속했다고 한다. 일본으로 송환하려고 꽤나 설득을 해야 했다는 말도 들린다.
자신의 신념만 고수하면 우리도 필리핀 정글에 갇힐 수 있다. 노인이 되면 완고해진다는 말을 많이 한다. 시대가 바뀌는데도 예전에 신념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뀌면 생각도 유연해져야 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품위 있는 추락
우리는 집단을 단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집단으로서의 공통점도 있겠지만 그에 속한 각 개인들은 저마다 다르다. 숲에도 다양한 나무가 있지만 그냥 퉁쳐서 숲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노인도 단일한 집단으로 생각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늙는 모습도 각자 많이 다르다.
엄마는 많이 배우지 못하셨어도 평생 자식을 위해 살아오셨다. 암진단을 받고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병원에 계실 때도 자식들 힘들게 하는 걸 더 걱정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께 살면서 가졌던 섭섭함은 다 용서하고 가니 자식들 힘들게 하지 말고 일찍 따라오시라 당부하셨다. 엄마의 고생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나로서는 납득이 가면서도 납득을 할 수 없던 가슴에 사무치는 장면이었다. 예기치 않았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나에게 회한과 함께 존경심을 남겨주셨다. 아버지는 늘 당신을 우선시하던 분이셨다. 돌아가실 때도 자식을 힘들게 하셨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씁쓸함을 남기셨다.
세월이 흐른다고 모두가 똑같이 늙어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품위도 돈이 많다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학벌이 좋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엄마는 학벌도 사회적 지위도 돈도 없으셨다. 그러나 누구 못지않은 인간의 품위를 갖고 계셨다.
나 또한 품위 있는 인간으로 늙어갈 수 있을까?
◈ 슬기로운 은퇴생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