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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 Oct 17. 2024

무수리 찬가

은퇴생활을 위한 다짐 1

은퇴를 하면서 몇 가지 다짐을 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다짐이란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는 의미지 그것의 실현가능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다짐도 지금 마음을 그렇게 먹기로 했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먼저 이리 설레발을 치는 이유는 나의 다짐이 어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입찬소리가 될 수도 있고, 앞으로의 생에 장담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아서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떠한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방학이 되면 계획을 세우던 습성이 있지 않은가?


은퇴 후 제일 먼저 다짐한 것은 가능한 의탁하지 않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자.


교직에 있을 때 ‘서로 빨대 꼽고 살자.'는 말에 공감했다. 교사들은 얼마든지 개인적 공간에서 개인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면 자기 안에 갇힐 수 있고 정체되기 쉽다. 요즘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교수방법을 공유하고 고민을 나누려는 여러 활동이 있다. 교실문을 열고 다른 교사들과 서로 수업을 나누고 공유하는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업을 공유하고 정보도 나누면 확실히 배우는 게 많아진다. 나이가 들어도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업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생활지도도 교사들이 방법을 공유하고 같이 할 때 더 효과가 있다. 빨대 꼽고 살자는 것은 그런 의미다. 표현은 그렇지만 뜻은 좋다. 


퇴직을 한 후, 나이가 들수록 빨대 꼽기는 상호적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 대등한 관계일 때 좋은 것이지, 일방적인 빨대 꼽기는 민폐가 될 뿐이다. 이제는 남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이 되고 짐이 될 수 있다. 


예전에 젊은 선생님이 엄마와 해외여행을 다녀온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엄마가 나보다 젊은데도 여행계획부터 모든 것을 자기가 한다며 말 그대로 효도여행이라 자주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반면교사가 되었다. 


나도 결혼 초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간 적이 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릴 때라 아이들 챙기기도 버거웠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시어머님이 이동할 때 가방을 들어주지 않았다며 서운하다고 하셨다. 그때 시어머님이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다. 성질이 못됐던 나는, 그 이후로 시부모님 여행은 보내드려도 같이는 안 가기로 마음먹었다. 


올 초에 딸과 함께 여행을 갔을 때 나와 비슷한 연배의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아내분이 자신도 딸과 여행하는 것이 꿈인데 딸이 싫어해서 남편과 한다며 부러워했다. 내가 보니 그럴만했다. 그분은 나와 달리 무수리가 아니었다. 대부분 남편이 다 챙겨주었다. 어떤 때는 우리 딸에게 이것저것 해달라는 경우도 많았다. 


평생을 무수리로 살면서 젊어서는 많이 억울했다. 결혼해서 남편한테 대접받으며 왕비처럼 산다는 얘기를 들으면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보니 무수리가  나쁜 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왕이나 왕비가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남이 다 해줄 형편이 되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럴 형편이 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울 수 있다. 일상의 많은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우리 무수리들은 생활을 위한 수많은 무기와 생존기법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여자들이 은퇴 후 생활에 적응을 잘하는 것도 이런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무수리들은 일상생활의 강자다. 일을 많이 해본 만큼 일머리도 좋다. 그런 면에서 세상은 나름 공평하다. 


은퇴 후에도 집안일을 하지 않으려는 남자들이 있다. 본인은 대접받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손발은 짧아져 쇠퇴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  대접받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짐이 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오죽하면 삼식이 XX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이제 시간도 많으니 일상의 집안일에 도전해도 늦지 않다. 


20여 년 전에 들은 얘기다. 평생 물 한잔을 직접 떠드시지 않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자식들이 돌아가시면 아버지 옆에 묻어드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차라리 강물에 뿌리라고 했다는 얘기다. 평생 손하나 까딱하지 않은 남편에 대한 뼈에 사무친 원망이 느껴진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내 주변만 보아도 남편이 요리하는 사람도 있고 집안일을 같이 한다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늦은 나이에 요리에 재능을 발견했다는 남편도 있다. 평생을 같이한 아내에게 그런 억울한 세상을 주느니 기꺼이 커피라도 타준다면 좋지 않은가? 참고로 나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가 남편이 타 주는 커피다. 


아들이 제대를 한 후 갑자기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다.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니 먼저 겪어본 선배들이 길게 가야 두 달이니 크게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우리 아들은 취직하기 전까지 3년 넘게, 시간이 나면 집안일을 했다. 나중에는 나보고 설거지가 깨끗하지 않다, 빨래를 잘 털어서 널어야 한다는 등 잔소리를 하는 경지까지 올랐다. 왜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군대를 가기 전에는 화장실은 원래 더러워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어. 관심이 없었지. 군대를 가서야 누군가 치우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됐어.” 공동생활을 유지하는데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깨달음이 왔다고 한다. 


공동생활을 유지하는데 내가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은퇴 후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게 좋다. 나이가 들면 남에게 대접받는 것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더 부러운 일이다. 무수리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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