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만나는 별 볼 일 없음 또는 쓸모없음
예전에는 노인이 되어도 공동체 안에 설 자리가 있었다. 물론 고려장 같은 극단적인 사례도 있지만 노인들은 대부분 설자리를 인정받았다. 노인에게서 연륜이나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있었다. ‘노인 한 사람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지식과 지혜가 공유되기 때문에 노인의 지혜는 별 볼 일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은퇴 후 손주를 돌봐주는 것도 노년의 삶을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자식들이 결혼도 늦게 하고 저출생으로 손주를 보는 것도 쉽지 않다. 오죽하면 손주 자랑하려면 돈을 내고 하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생겼겠는가? 나도 손주가 생기면 기꺼이 봐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기회가 올지 모르겠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아기들 쇼츠를 보고 있으니 딸이 뭐 하냐고 묻는다.
“너랑 오빠가 결혼할 생각을 안 하니 랜선 손주라도 보려고.”
“엄마 조금만 기다려봐, 현실에서 예쁜 손주 구경시켜 줄 테니.” 이런 대답을 기대했다.
역시나. “네 열심히 랜선 손주 재롱 즐기세요.” 자기는 여전히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한다.
손주를 본 지인들을 봐도 요즘 젊은 엄마들은 육아 방법을 친정엄마를 통해 얻지 않는다. 친정엄마보다 센 ‘조동카’라고 들어봤는지? ‘조리원 동기 카페’를 줄인 말이란다. 맘카페나 조리원 동기카페에서 서로 육아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엄마의 육아방식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엄마들이 딸의 지침에 따라 손주를 봐주어야 한다.
직장을 떠나니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가 없다. 가정으로 돌아왔으나 자식들은 다 커서 내 손이 필요하지 않다. 내 존재를 증명할 곳이 없다. 나이가 든다고 인정욕구가 저절로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자들은 더하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사람들은 손발도 짧아져서 일상에 더 서툴다. 다른 사람을 시키다 보니 막상 스스로 못하는 일이 많다. 나름 인생은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버릇 못 고치고 집에서 아내에게 똑같이 하다가는 큰일 날 수 있다. 퇴직 후 남자들이 우울감을 더 많이 느낀다. 조선희의 소설 <그리고 봄>에도 대학교수를 하다 퇴직한 아버지가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얘기가 나온다. 퇴직한 남자들이 불면이나 우울의 문제를 겪는 것이 드문 경우는 아니다.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한 분이 밥을 먹다 갑자기, 만날 사람도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도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밥보다 소중한 인정욕구
몇 년 전 재미있게 보았던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 있다.
“날 추앙해요. 나는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내가 만났던 놈은 다 개 xx.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로는 안 돼.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드라마의 주인공인 막내딸이 썸을 타는 남자에게 하는 말이다. 회사에서 무시당하고, 애인에게 사기까지 당한 주인공은 연애의 상대방에게 사랑이 아니라 추앙을 요구한다. 우리가 구어체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용어인 추앙을 사용한 것도 특이했지만 사랑보다 존중을 원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이 바로 인정이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된 아이들은 웬만한 맷집이 아니면 급식실을 가지 못한다. 배고픔은 참아도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회적 낙인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코로나 때 감염방지를 위해 지정좌석제를 운영한 적이 있다. 자기 맘대로 자리에 앉지 못한다고 불만인 학생도 있었지만 친구가 없는 학생들은 낙인을 걱정하지 않고 식당에 올 수 있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좌석을 정하는 것은 겉으로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 같지만 교실 내 숨겨진 서열관계가 드러나 상처받는 아이들이 생길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배고픔이 더 기본적인 욕구라고 생각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사회적 평판 내지 인정욕구가 더 중요한 때가 많다.
인정투쟁으로 사회를 설명하는 철학자도 있다. 인정을 향한 투쟁으로 개성이 확장되었다고도 한다. 소수자들의 정체성 정치를 지지하는 철학적 기반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자기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실현된다. 자기 정체성은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만 우리가 부여받고 싶어 하는 가치를 얻게 된다. ….. 무시에 대한 경험은 한 인격체 전체의 자기 정체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파괴의 위험을 동반한다. ….. 인간의 사회적 생활에서 발전과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힘이 인정투쟁이다. <악셀 호네트, 인정 투쟁>
위태로운 인정욕구
인정욕구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며 때로 밥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인정욕구가 지나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인정욕구가 타인을 조종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생각을 추종하던 시절이었다. 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시험을 예상외로 잘 본 날이었다. 당연히 늘 하던 대로 마구 칭찬을 날렸다. 그런데 딸의 반응이 싸했다. 부담스럽다며 항의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요지는 엄마가 칭찬을 통해 자신을 조종하려는 것 아니냐는 항변이었다. 나름 충격이 왔다. ‘칭찬을 통해 아이가 내 기대를 충족해 주길 바랐던 건가?’ 의식하지 못했던 나의 속내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 후론 무조건 칭찬은 지양하려고 노력한다. 팩트만, 사심 없이, 칭찬하기.
오래전에 독선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원성이 자자한 교장이 있었다. 대부분 교사가 교장을 비판하는데 한 선생님이 교장이 나한테는 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교장은 문제가 많지만 나를 대접을 해주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이다. 그때 자신에 대한 인정여부가 관리자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앞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적인 관계에서는 객관적인 평가보다 나에 대한 태도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남에게 좋은 남편보다 나에게 잘하는 남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되면 위태로울 수 있다.
인정욕구가 앞서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볼 수 있다. 혹은 옳고 그름이 뒤로 물러난다.
나치 전범들을 보면 능력도 있고, 좋은 아빠인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요즘 화제가 된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영화가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 회스 중령이 주인공이다. 아우슈비츠는 유태인을 집단학살 하기 위해 만들어진 절멸수용소다. 회스 소장은 가스실에서 유태인 백만 명 이상을 학살한 사람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딸에게 책을 읽어주고 아이들과 물놀이도 해주는 자상한 아빠다. 일도 열심히 하고 성실하다. 그의 딸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한나 아렌트는 또 다른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그들이 학살을 저지른 것은 특별한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사유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이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게 한 기저에 인정욕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회스 소장은 유대인 말살 정책을 잘 수행해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 영화 끝부분에 이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 나온다. 회스가 파티를 하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이다. 유태인 절멸작전의 이름이 ‘회스작전’이라며, 자신의 이름이 붙었다는 것을 자랑한다. 그 부부는 뿌듯한 기쁨을 나누는 장면인데 보는 관객에게는 끔찍하다. 이는 인정욕구가 앞서서 옳고 그름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남 얘기가 아니다. 학교에서 월급 루팡처럼 생활하는 교사도 문제지만, 너무 열심히 하는 교사도 걱정이 될 때가 있다. 나 역시 내 일욕심에 갇혀 다른 사람을 제대로 배려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주변에서도 상사에게 인정하고 잘하고 싶은 욕심에 생각 없이 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경우도 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이 승진에 대한 열정으로 바뀌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우리 안에도 아이히만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인정욕구는 인간에게 필수적이고 소중한지만 위태로움도 갖고 있는 금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