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세상 일이 100% 좋은 것도, 100% 나쁜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물에만 빛과 그림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다. 신중년의 등장으로 60대는 아직 노인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그림자는 무엇일까? 파우스트는 젊음의 대가로 영혼을 팔았다. 우리는 그 정도의 젊음을 산 것도 아니니 영혼까지 팔 필요는 없다. 그래도 감당해야 할 무게는 있지 않을까?
지하철을 타면 '행복하세요.'라는 멘트가 나올 때가 있다. 무임승차를 방지하기 위해 65세 이상 노인카드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한다. 현재 법적인 노인연령은 65세다. 65세가 되면 누리게 되는 혜택이 쏠쏠하다. 지하철 무료탑승을 비롯해 문화재 관람과 공공시설 이용할 때 할인 혜택을 받는다. 이 기준을 높이자는 얘기가 종종 들린다.
65-69세 사람 중 다수는 주관적으로 자신을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법적 노인 연령을 높이자고 하면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사회에 충분히 공헌한 만큼 그 정도는 누려도 된다고 얘기하시는 분도 많다. 그런데 우리는 남보다 더 힘들고 더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세대가 다른 세대보다 더 힘들게 살아왔다는 생각은 대부분의 세대에 공통된 것이다.
'교사는 평균 수명이 짧아 연금을 오래 받지 못한다.'교사가 되었을 때부터 여러 선생님에게 듣던 얘기다. 교직이 얼마나 힘들면 교사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도 있겠는가? 그런 근거가 이어졌다. 그러나 태생이 의심이 많던 나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궁금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봤다. 공무원 연금공단 자료를 보면 2022년 공무원의 직종별 평균 수명이 법관·검사가 81세, 교육직 80세, 별정직 79세, 경찰직 78세, 일반직 75세, 공안직 74세, 소방직 73세라고 한다. 교사는 다른 공무원에 비하면 평균수명이 높은 편에 속한다. 공무원 전체 평균수명이 타 직종에 비해 낮다면 그것은 소방직의 평균수명이 낮기 때문이다.
교사의 평균수명이 낮다는 어림짐작은 교사 집단이 자기중심적 편향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거의 모든 집단이나 세대에서도 나타난다.
대니얼 카너먼이 쓴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책이 있다. 인간의 인지편향에 대해 많은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자신을 평균이상으로 생각하는 인지편향이 나온다.
가사에 대한 기여도를 질문했을 때 자신의 기여도를 상대 배우자의 기여도보다 높게 기억한다. 팀으로 공동작업을 할 때에도 많은 사람이 흔히 자기 공을 실제보다 크게 느낄 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이 자기 공을 몰라준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도 편향이 작용한다.... 여럿이 스스로 평가한 자신의 기여도를 모두 합하면 보통 100%가 넘는다.
자기 중심적 편향은 집단으로 확대되어도 비슷하다. 그러나 조금 거리를 두고 생각하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다를 뿐 모든 세대가 각자의 어려움을 갖고 살고 있다. 젊은 세대는 물질적으로는 우리보다 풍족하게 산다. 그러나 우리가 경제가 확대되는 시기에 계층을 상승시키며 살아왔다면 지금 젊은이들은 경제가 축소하는 시기에 부모보다 못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우리 세대는 2차 베이비붐 세대와 더불어 많은 쪽수로 사회의 기준을 바꿀 수 있는 세대다. 그에 비해 지금 젊은 세대는 5060보다 적은 인구수로 엄청 늘어난 노령인구를 부양해야 할 세대가 될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나라의 급격한 노령화는 법적 노인연령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젊은 세대의 부담을 생각한다면 우리 스스로 전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사회적으로 젊어지는 만큼 치러야 할 대가도 있다.
작년에 베를린에서 한국인 가이드 투어를 할 때였다. 대중교통을 탈 때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 독일 노인들은 자리를 양보하면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차별이 없으면 배려도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나이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는다면 나이로 대접할 필요도 없다. 또 하나는 시스템이 바뀌면 노인의 의식도 바뀐다는 것이다. 노인 스스로도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리 양보에 자존심이 상하다니. 우리로서는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노인을 대접했던 마지막 세대이자, 노인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는 의미에서 마처세대가 될 수 있다.
신중년의 등장으로 우려되는 점이 있다. 혹시 젊음 도둑이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점이다. 박완서의 가난 도둑에는 다음 구절이 있다.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부잣집 대학생이 가난 체험을 한 것을 안 후에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5060 세대가 신중년으로 등장하는 것도 젊은이들에게 박탈감을 줄 수 있다.
최근에 부자 노인이 증가하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60세 이상 가구주의 자산이 40세 미만 젊은 가구주 자산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재산을 형성한 1차 베이비부머가 은퇴한 영향이라고 한다. 김난도 교수는 5060 세대를 ‘시니어’가 아닌 영 피프티”라고 말한다. 젊은 사람들이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젊어지려는 50대의 몸부림”이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경제적으로 청년들보다 잘 살면서 일자리까지 탐내는 것은 아닌가? 돈도 많은 5060 세대가 나이 듦을 부정하고 젊음까지 탐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정서적 거부감의 표현 같았다.
미국의 한 억만장자는 젊어지기 위해 한해 25억 이상을 쓰고 심지어 10대 아들의 혈장을 수혈받는다고 한다. 인타임이라는 영화에서도 부자들이 가난한 젊은 사람들의 시간을 사서 자신의 젊음과 수명을 연장하는 얘기가 나온다. 좀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나 그냥 두면 쉽게 선을 넘는 게 젊음에 대한 욕망이다. 5060 세대를 노년기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나이 듦을 거부하거나 젊음을 되돌려주는 것은 아니다. 나이 듦을 인정하되 너무 빨리 노년으로 규정하지는 말자는 의미다. 신중년의 등장이 사회적으로 어떤 정서적 감정을 갖게 할지 아직은 미지수다. 신중년 혐오가 늘어날지, 나름의 인정을 받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