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BWA에서 보낸 6개월이라는 시간은 나를 크게 성장시켰다.
하지만, 난 실패했다.
대학생활 동안 꿈꿨던 광고대행사 입성, 카피라이터의 꿈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순위로 내가 하고자 했던 것은 홍보 관련 업무였다.
사실, '광고'와 '홍보'는 생각만큼 가깝지 않다.
모 대학에 '광고홍보학과'라는 학과가 있고 신문방송학과에서도 '광고'와 '홍보' 수업이 함께 커리큘럼에 있기 때문에
언뜻 생각해보면 둘은 형제와도 같이 느껴지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회사에 들어오고 난 뒤에 알았다.
'광고'는 '야근'과 형제이고
'홍보'는 '술'과 형제가 아닐까.
여튼, 나는 정수기로 유명한 C사와 정유/화학으로 유명한 G사 홍보팀에 인턴으로 지원했다.
있는대로 다 지원하려고 했으나 '홍보' 직무로는 TO가 잘 없다 보니 뽑는 곳이 손에 꼽았다.
나름대로 자신만만 했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리고 뭔가 힘들고 지치는 취업 전선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2. '홍보'와도 안녕
C사와 G사 모두 서류 불합격이었다. 충격이었다.
나름 우리 대학 '홍보대사'부터 유명 기업들의 '홍보대사' 대학생 참여 프로그램까지 두루 경력을 쌓았던 나였기에 자신 있었다.
뒤늦게 G사에서 전화 연락이 왔다. 면접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단다.
대신, 근무지는 지방으로 바꾸고자 하는데 그래도 면접을 보겠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면접장에 도착하니, 어마어마한 스펙의 소유자들이 앉아 있었다.
"준비해온 서류들 제출해주세요~"
주섬주섬 내 서류들을 들고 나갔는데..웬 서울대생들이 이렇게 많은지, 게다가 토익 점수는 950점 이상에..심지어 만점자들도 있었다.
누가 내 서류를 볼까봐 쫄아서 얼른 숨기듯이 밀어 넣고 자리로 돌아왔다.
주요 면접으로 인성 면접과 토론 면접이 있었다.
당시 <100분 토론> 같은 토론 프로그램에 심취해있고 도서관에서 취업 공부는 안 하고 <시사인>, <한겨레21> 같은 주간지를 즐겨 읽던 나는, 토론 면접이 두렵지 않았다.
'이 샌님들을 내가 박살내주지'
나중에, 이 때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깨닫게 되었는데..그 깨달음이 오기 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종부세'와 관련된 주제가 주어졌는데, 4:4로 편이 갈리지 않아 3:5가 되었다.
내가 3이었고 이 쪽의 주장은 야당의 의견과 비슷한 쪽이었다.
(왜 5명의 그들이 모더레이터의 종용에도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는지도 너무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필이면, 나와 같은 조였던 나머지 2명은 말도 제대로 못했다.
나는 거의 1:5로 싸웠는데 <100분 토론>을 상상하면서 아주 공격적인 태도로 토론에 임했다.
내 자리에만 볼펜이 없었는데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고 아무 것도 적지도 않았다. 그냥 다 발라버릴 수 있다는 생각 뿐이었다.
"네, OOO님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저 역시 그 의견에는 일부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저의 생각은..."
뭔가 끄적끄적 적으면서 가식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올곧게 앉아 있는 다른 면접자들을 보니 불쾌했다.
"지금 굉장히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데요. 정부의 정책이 이 시점에서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자체가 착오입니다. 시민단체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OOO의 OO.O% 그리고 OO.O%가..."
주간지를 읽으면서 조사 결과의 소수점 %가 다 외우고 있던 나는 상대방 5명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 버렸다.
정교한 데이터를 근거로 들이대는 이상 그것을 맞받아치기는 여간해서 쉽지 않다.
당연히 합격이라고 생각하고 합격자 조회를 했던 나는, 그 결과를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다시 조회를 했다.
전산 오류가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나의 오만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TIP
토론 면접을 할 때는, 절대로 공격적인 자세를 갖거나 너무 튀거나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
토론 면접은, 일종의 '가상 시험'이다. 입사 후에 동료들과 회의를 할 때 어떤 모습일지를 가늠할 수 있다.(당신이 면접관이라면, 듣기보다는 말하기 좋아하고 비판적인 자세로 남을 무시하는 사람을 뽑겠는가?)
정치적인 주제가 나온다면, 야당보다는 여당의 의견 쪽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특히, 대기업이라면 더더욱.
3. 엉뚱한 곳에 서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목표도 떠나가 버리고 나자, 나는 찬 밥 더운 밥 가릴 것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만만해보였던 세상이 갑자기 거대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서 비웃는 듯했다.
오만 생각들이 다 오고 가고, 그 생각들은 여기에서 정리 되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들이 찾는다는 모 백화점. 나는 이 곳에 (드디어)정식 인턴사원으로 발을 내딛었다.
2개의 부서를 로테이션했는데, 첫 번째 부서 업무는'판매기획' 그리고 두 번째 부서 업무는 '식품영업'이었다.
그저 화려하게만 보였던 백화점의 이면,
그리고 그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하듯 스스로를 전쟁터로 내몰고 있는 수많은 직원들.
그들의 엄청난 노력과 노고는 26살 풋내기였던 나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판매기획 업무는, 점포를 찾는 고객들의 내방을 촉진시키기 위한 프로모션을 기획하는 것이었다.
생짜 인턴이 여기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 하지만 운 좋게도 인생의 멘토로 삼을만한 분을 여기에서 만나게 되었고
- 팀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위와 권력의 힘을 알았고
- 보통의 직장인들이 어떻게 회사 생활을 견디고 또 소리 없이 나이 들어가는지 알았고
- 열심히 짐을 나르고 박스질을 했다.
식품영업 업무는,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송곳>과 비슷한 모습이랄까(그래서인지 괜히 더 반갑고 공감된다).
물론, 그런 부조리함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 부장도 여지 없이 객장에 나오면 쓰레기를 줍고 카트를 민다는 걸 알았고
- 그 날 결국 팔지 못한 식품들은 직원들 상대로 재판매된다는 걸 알았고
- 정신없지만 엄청나게 활기차고 역동적으로 일하는 곳이라는 걸 알았고
- 어느 새 나는 카트 정리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TIP
유통업체의 경우, 영업 조직의 영향력이 크고 강력하다. 또한, 핵심 부서이기도 하다.
마케팅도 중요한만큼 주요 부서 중 하나이다. 그러나 보통 마케팅 중심의 회사에 비해 세분화되어 있지 않다.
마케팅 중에서도 (Sales)Promotion에 대한 부분을 주로 수행하며, 광고는 BTL이나 인쇄매체 비중이 높다.
백화점의 경우, 식품 매장의 중요도가 굉장하다. 최근 몇 년간 일어난, 백화점 간 유명 식품 입점 경쟁을 보라. (식품 매장으로 고객을 유인한 뒤, 다른 매장에서까지 소비를 확장하게 하는 전략)
의외로, 치열하면서도 역동적인 이 곳이 좋았다. 재미있다고 느꼈다.
광고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도 같았다.
그러는 사이, 여름도 저물어가고 나는 어느덧 대학생활 마지막 학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4. #6-에필로그
어쩌다 보니, 자전적인 이야기들만 가득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와 재미있게 읽어 주시는 분들이 있어, 앞으로는 광고/마케팅/취업 관련하여 도움이 될만한 부분이 내용 중에 있으면 이번 편처럼 따로 정리하고자 합니다(TIP).
또, 범주를 좀 더 넓혀 '광고 이야기'가 아닌 '광고/마케팅 이야기'로 넓게 열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