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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Jul 29. 2019

11. 멍 때리는 시간

(Week 5) 생각 비우기 연습

1년, 즉 52주가 주어졌으므로 이제 약 10%가 지나갔고 100개의 글을 쓰리라던 목표에도 딱 10% 도달했다. 끝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끊임없이 재료를 찾아내고, 깊이 생각해보고, 글로 정리하는 노력인 것 같다. 아직 초반이라 이것저것 해나갈 일이 뚜렷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크게 새롭지 않을 것만 같은 길고 긴 건기(乾氣)


흔들림 없이 무언가를 생산하는데 일정한 리듬을 가진 루틴만큼 도움이 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의외로 멍 때리기가 창조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일찍이 회사 다니며 경험한 적이 있다. 특근이 미덕이던 길고 긴 암흑기를 지나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려던 초기, 업무 지시는 아직 52시간에 맞춰지지 않아 다소 혼란스러운 시절이 있었다. 산적해가는 현안 업무를 다 마무리하지 못한 채 PC 강제 종료되어 집으로 오면 영 개운치가 않았고, 쌓여있는 걱정에 아침 일찍 눈이 떠지지만 회사에 일찍 간들 PC를 켤 수 없는 상황.



무작정 일찍 나와, 강남 일대를 걷기 시작하였다. 업무를 생각해도 머릿속에서 경우의 수가 맴돌 뿐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지만 아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업무 생각이 머릿속을 좀처럼 벗어나질 않는다. 평소 잡생각이라 치부하던 딴생각을 억지로 집어넣어도 보고, 옛날 노래를 흥얼거리기를 며칠. 차츰 고름진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치 두더지 게임 같이, 쉼 없이 튀어 오르는 생각의 조각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기.


일련의 정화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머릿속이 상쾌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억지로 생각을 쥐어짤 때는 도저히 나오지 않던 아이디어들이, 의외로 쉬이 떠오르는 경험. 오래된 천으로 꽉 막힌 실린더를 통해 물 한 방울 흘리려 할 때에는 천을 적실뿐 물이 흐르지 않았으나, 천을 걷어내자 그저 한 방울 두 방울 말 그대로 물 흐르듯 흐른다. 이후 아침이면 다만 몇분이라도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나만의 시간을 갖는 루틴이 생겨났다.


아무 '생각' 없는 상태에서도 무언가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떠오른다는 사실이 다소 모순적이긴 하나, 그 차이는 '생각'에 의도가 있는지 여부인 것 같다. 멍 때리기는 억지로 무언가를 해내려는 내가 아닌, 하얗게 비운 상태의 내가 행하는 창조적이고 때로는 매우 생산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리고 이 행위는 매시 매분 매초 치열한 서울에서 뿐 아니라 시간이 멈춘듯한 미국 땅에서도 유효한 것 같다. 남은 90%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까 생각하려 애쓰면 꽉 막혀 있다가도 그저 가만히 멍 때리고 있자니 생각이 다시 꿈틀대고, 낚아 채는 일은 온전히 나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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