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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Jul 07. 2019

5. 계획대로 되지 않는 즐거움

(Week 2) 여행의 이유

새삼 다시금 느끼지만, 미국에서 일상생활을 위한 서비스는 대체로 한번에 해결되는 경우가 없다. 공항 도착 후 가장 먼저 만나는 입국심사 대기 줄에서는, 비자 신청자가 가라는 위치로 가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마지막에 여기는 ESTA라고 다른 줄로 다시 안내를 한다. 렌터카 업체는 현재 예약번호가 아닌 기존에 취소한 예약번호로 차를 출고하여, 렌트 기간과 금액이 상이한데도 맞는 예약으로 변경을 안해준다. 인터넷은 회사 측에서는 잘 들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여전히 먹통이다. 전기를 신청하고자 전기회사 서비스 센터를 검색해 찾아가니, 변전소가 나온다. (일부 나의 실수도 있었지만)


'이런 나라를 어찌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를 수 있을까'


4년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어김없이 또 느끼게 된다. 당시 비슷한 경험을 했던 친구들과 이야기해본 결과,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는 것. 정말 머리가 잘 돌아가고 일을 잘하는 사람은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대충 돌아가도 약간 불편할 뿐 사는데 지장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은 덜 중요한 자리에 위치할 것이라는 가설.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아니, 그게 아니면 정말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정착 서비스를 자청했던 내 역할은 하루 이틀 지나자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제는 다 포기한 심정으로 모든 것을 한번에 잘 처리하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문득, 김영하 작가님께서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해주신 말씀이 뇌리를 스친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데 있습니다. 정말 최악의 여행은, 모든게 계획대로 너무나 순조롭게 흘러간 나머지 무슨 여행이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 여행이지요. 결국 추억이 되는 것은 예상치 못하게 다가온 순간들입니다."




듣는 순간 고개가 끄덕여졌고,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3년전 홀로 3주간의 남미 배낭여행을 갔을 때 애당초 계획했던 가장 손꼽은 일정 Top 3는 마추픽추, 우유니 소금 사막, 티티카카 호수 투어였으나, 여행이 끝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일정은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하루 일정이 비어 시간이나 때우자는 마음으로 신청한 페루 쿠스코 근교의 비니쿤카 투어. 나보다 지쳐 보이는 말을 타고 헉헉 대며 올라간 산 정상에서, 짙은 안개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 한 시간 가량 기다리니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마법 같은 풍경.


(가파른 언덕에서는 도저히 미안해서 못타고 내려서 같이 걸었다.)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에서의 환상적인 인생샷을 기대하고 출발하였으나, 관광수입 배분에 불만을 품은 마을 주민들의 파업 및 도로 점령으로 새벽 6시 20KG 이상의 짐을 20Km 이상 걸었던 기억과 우여곡절 끝에 탑승한 투어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Oasis 의 명곡 'Don't look back in anger'


(정작 우유니 사막은 나에게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미의 유럽이라는 산티아고는 남미도 유럽도 아닌, 애매한 불협화음을 뿜어댔으나, 민박집에서 만난 친구와 무심코 떠난 발파라이소에서 경험한, 여느 항구도시와는 또 다른 독특한 풍경과 음식, 사람들.


(최근까지도 서울에서 종종 만난다.)


이렇듯 예상치 못한 우연의 순간들이 기억되는 것은 분명 행복한 경험이다. 오늘은 당혹스럽지만, 곧 어제의 기억이 되고 이는 내일을 살아가는 하나의 에너지가 된다. 오늘은 매 순간 한번뿐이지만, 좋은 기억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영원하다 한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오늘은 곧 어제가 되고, 어제는 다시 내일이 되는건가. 족보가 꼬여버린다. 그래서 까르페디엠, 까르페디엠 하는가 하는 깨달음에, 결국 돌고 돌아


'이 또한 지나가리가'


혹은,


'이 또한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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